시선

좋은 시 다시 읽기 (시와 상상 2008 여름호)

주선화 2008. 6. 18. 11:13

카타콤베* /김지유

 

 

가윗날이 심장께 박혀있는 라코스테 상표를 파낸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솟은 성기를 잘라낸다 할퀴는 곳마다 돋아나는 기억을 썰어내는 소리, 돌아오지 않는 사내의 발목을 자른다 약속의 소매에 거침없이 끼우던 팔짱도 절단한다

 

바람난 사내의 혀처럼 현란해지는 몸놀림, 신들린 가위질이 방안의 어둠마저 찢어낸다 열린 옷장 앞에 앉아 남김없이 끄집어낸 옷더미를 헤집으며 작두를 타는 손가락, 오래전에 식어버린 사내의 체취를 도려낼수록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오르가즘의 집요함

 

토막난 사지들이 차곡차곡 쌓여진 옷무덤에 가만히 얼굴을 파묻은 채 제 손목 위로 현을 켠다 너덜너덜한 옷자락 사이로 툭툭 뜯어지는 봉합사, 피에 섞여 흘러내리는 끈적한 미련의 체액들, 사내의 몸을 조이던 가랑이처럼 손가락에 단단히 끼워져 빠지지 않는 가윗날이 입을 앙다물며 마지막 신음을 삼킨다

 

 

* 로마 고대 기독교인들의 지하묘지

 

- 《현대문학》2008 2월호

 

 

몸,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의 무덤

 

너덜너덜 겉표지 떨어져나간 수첩 한 귀퉁이에 이런 구절을 쓴 적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허공에 떠있다는 느낌, 그때 내려다본 내 몸이 곧 무덤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랑하거나 사랑받는다는 것이 두렵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을 아파하다 망하고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닐까.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숨기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를 나보다 먼저 찾아낸 시인을 만났다. 카타콤베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무덤이었고 그 무덤은 가장 위대한 예식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에서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김지유는 자신의 몸을 무덤삼아 뼈아픈 예식을 치른다. 물론 김지유의 시는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뻐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을 시적 모티브로 복제, 형상화한 것은 아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카타콤베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몸을 붙들어 매는 끈이나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을 뜻하며, 욕망이나 소유욕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듯 김지유의 시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은 달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무덤 지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다소 섬뜩한 언어로 역설하는 김지유의 시는 인간에겐 불멸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여정이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이긴 것은 카타콤베를 그 본영으로 삼고 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김지유에게 사랑은, 상처를 본영으로 욕망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전제로 한다.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참 종교가 핍박을 바탕으로 자란다고 한다면 사랑은 상처를 배경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사랑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자학이라고 규정한 김지유에게 그 자학의 가윗날이 향하는 곳은 무덤이다. 쉽게 말해 극단적인 사랑의 상처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는 김지유에게 선택은 하나, 사랑을 무덤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김지유의 시를 도발 혹은 욕망으로 읽는 일부 평자들의 시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욕망을 거부하는 자기혐오의 방식으로 사랑을 재해석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솟은 성기를 잘라내는󰡑�그녀의 행위는 욕망이 내장된 사랑의 상징일 뿐 욕망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김지유 시에서 욕망은 상처받은 사랑을 무덤 짓기 위한 하나의 시적 음모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지유의 󰡐�바람난 사내의 혀처럼 현란해지는 몸놀림, 신들린 가위질󰡑�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장된 욕망을 제거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지하묘지에서 불태우며 소리없이 박해의 칼날을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의 안식처 카타콤베가 김지유의 시에서는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무덤으로 치환된다. 인생은 죽음이 종말인 슬픈 여정이 아니라 낡은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임을 나타내는 배 그림 등 거의 모든 석관에서 볼 수 있는 카타콤베의 벽화까지 김지유는 언어로 형상화한다. 󰡐�열린 옷장 앞에 앉아 남김없이 끄집어낸 옷더미를 헤집으며 작두를 타는 손가락, 오래전에 식어버린 사내의 체취를 도려낼수록 살 속 깊이 파고드는 오르가즘의 집요함󰡑�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사내의 몸을 조이던 가랑이처럼 손가락에 단단히 끼워져 빠지지 않는 가윗날이 입을 앙다물며 마지막 신음을 삼킨다󰡑�는 김지유의 마지막 진술은 사랑을 잃는 순간 그 사랑을 소유했던 사람의 몸은 곧 무덤으로 전락한다는 절규로 상처받은 영혼들의 가슴을 울린다. (김륭)

 

  

 

일산 국립암센터에서/박명용

―새벽

 

하얀 물결 소리

내 의식을 일깨워

유년의 강변으로 이끄는 새벽

몇 날째인가

뿌연 안개밭, 어쩌면 저렇게 신성할 수가 있는가

새벽 소리가 들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나는

마냥 설레는 하루를 맞는다

 

 

 

일산 국립암센터에서/박명용

―햇살

 

오후가 되면

서향의 입원실에서 햇살 몇 줌 들어와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햇살을 따라

발길을 이리저리 옮긴다

순간,

눈부신 햇살,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인생처럼

오늘도 그렇게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기다려지는 햇살 몇 줌의 사랑

 

- 《시와 상상》 2008 봄호

 

 

죽음, 맑은 정신으로 닦아내는 새벽

 

시인은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죽음을 만났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눈이 아주 맑은 소년이 살던 유년의 강변으로 가닿는다. 안개 속 같은 사회에 대한 실망과 불안, 절망감도 인간의 어깨 너머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욕망 또한 버리고 산 그의 면모가 작품으로 발화되는 순간이다.

언제 어디서나 참된 마음만을 담아 죽음까지󰡐�하얀 물결 소리/내 의식을 일깨워/유년의 강변으로 이끄는 새벽󰡑�으로 담아낸 시인.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몸으로 승화시킨 그의 시적진술이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몇 날째인가/뿌연 안개밭, 어쩌면 저렇게 신성할 수가 있는가󰡑�죽음을 만난 시인이 뒤돌아본 생은 새벽이고 따라서 마지막 가는 길마저 신성한 새벽이었을까. 그에게 죽음은 세상과의 단절이나 고독, 절망이나 허망함이 아니었다.󰡐�새벽 소리가 들릴 때마다/새롭게 태어나는 나는/마냥 설레는 하루를 맞는다󰡑�고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죽음의 어깨까지 다독여낸 시인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물어본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을 눈부시게 그리고 너그럽게 살아내고 있는 것일까.

 

시인이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오래 전이었고 더 이상 들춰지지 않았던 그 생각이 다시 가슴을 스친 것은 시와 상상 2008 봄호에 실린 시인의 작품을 통해서다. 󰡐�오후가 되면/서향의 입원실에서 햇살 몇 줌 들어와/눈앞에 어른거린다/나는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햇살을 따라/발길을 이리저리 옮긴다󰡑�

입원실을 들어와 어른거리는 햇살을 따라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는 시인의 모습이 죽음을 앞둔 노인의 고적한 장면으로 연상되지만은 않는다. 차라리 막 잠에서 깨어난 소년의 모습으로 포착된다. 이는 시적 형상화의 문제 이전에 시인이 가진 따뜻한 심성과 맑은 정신이 낳은 역동성이 행간의 여백과 어우러져 새롭게 조형해내는 진실의 힘이다.

죽음을 예감한 시인은 마지막까지 인생은 무상하다는 흔해빠진(?) 깨달음 같은 것으로 영혼을 결코 포장하지 않았다. 맑은 정신은 나이든 육체마저 거울처럼 닦아내는 것일까. 그의 삶과 시가 그랬듯이 살아생전 자신의 죽음을 데려와 햇볕 한 줌 더 쥐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참된 시인은 그렇게 우리 곁을 눈물겹게 떠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기다려지는 햇살 몇 줌의 사랑󰡑�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한 세상을 잠시 접었을 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김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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