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추천 100

벌레시사

주선화 2008. 10. 28. 15:07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벌레시사 詩社/문태준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 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정자亭子 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시사詩社라 불러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무봉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입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 올 한 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 김길록 ‘복사꽃 마을’ 

 

 

 

 

 

'현대시 추천 1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숲으로 된 성벽  (0) 2008.10.31
초록 거미의 사랑  (0) 2008.10.29
아라베스크  (0) 2008.10.27
말 벗  (0) 2008.10.24
마흔이 되고 보니  (0) 2008.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