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나뭇잎은 칸칸이 떨어집니다 / 신용목

주선화 2019. 10. 2. 10:37

나뭇잎은 칸칸이 떨어집니다

- 신용목



가로등은

가로수를 흉내 내느라 노랗게 농한 열매를 떨어뜨립니다. 가로수는


쓰러지기 싫어서 침대를 세워놓고 자는 사람 같습니다.


한 시간씩 잠을 자듯 칸칸이 어둠을 베고 누워 있습니다. 꿈의 어디쯤에

서 건너야 하나.


두리번거리면


보세 가게


마네킹은 두 달째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두 달 전 나는 마네킹이 옷

을 입는 장면을 목격한 적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월이었고


벌건 대낮이었는데, 아무 거리낌없이 ‥‥‥


팔을 뚝 떼어냈습니다.


저 옷입니다. 빨간 바탕에 수놓은 흰 나뭇잎을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더웠고

사람 많은 큰길이었는데

긴 소매 속으로 팔을 쑥 끼어넣었습니다.


이목구비 없는 마네킹이었는데

얼굴을 지워버린 것 같았습니다. 밤의 검은 벽에 갈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밤은 칸칸이 지나가니까.


가로수는

가을을 흉내 내느라 노랗게 농한 불빛을 떨어뜨립니다. 마네킹이야말로

한 시간씩 건너가는 사람입니다.


빨간 바탕에 흰 나뭇잎이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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