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중독 / 한선자

주선화 2020. 12. 31. 09:44

중독

 

ㅡ 한선자

 

 

습관에서 버린 지 오래된 병이다

 

잊었다고 믿는 슬픔이

손톱 밑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일까

 

저녁이 낮게 깔린 뒷골목 식당

입구를 꼭꼭 막아놓은 약병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오작동으로 함부로 살아온 심장이

골목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앓았던 몸살들이

 

나를 갈아먹는 끈질긴 뿌리가 되었다

그 후 몸의 회로가 멈춘 입구에 약병이라 써 붙었다

 

그리고 중독이라는 별명도 버렸다

 

그러다 오랜만에 약병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이다

내가 무섭다거나 네가 좋다는 건 사치다

 

손톱 밑의 슬픔을 약이라 부르는 것이 중독일까

 

구름을 잔뜩 집어삼키고 담장을 넘는 능소화

미와 솔 어디쯤 술을 쏟아버린 고장 난 피아노

버려진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반성문을 쓰는 고양이

 

중독은 호시탐탐 나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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