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ㅡ 한선자
습관에서 버린 지 오래된 병이다
잊었다고 믿는 슬픔이
손톱 밑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일까
저녁이 낮게 깔린 뒷골목 식당
입구를 꼭꼭 막아놓은 약병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오작동으로 함부로 살아온 심장이
골목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앓았던 몸살들이
나를 갈아먹는 끈질긴 뿌리가 되었다
그 후 몸의 회로가 멈춘 입구에 약병이라 써 붙었다
그리고 중독이라는 별명도 버렸다
그러다 오랜만에 약병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이다
내가 무섭다거나 네가 좋다는 건 사치다
손톱 밑의 슬픔을 약이라 부르는 것이 중독일까
구름을 잔뜩 집어삼키고 담장을 넘는 능소화
미와 솔 어디쯤 술을 쏟아버린 고장 난 피아노
버려진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반성문을 쓰는 고양이
중독은 호시탐탐 나를 노린다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 길 / 문수영 (0) | 2021.01.07 |
---|---|
말문 / 김지헌 (0) | 2021.01.01 |
먹먹, 세렝게티 / 정이경 (0) | 2020.12.30 |
노거수 아래 / 함명춘 (0) | 2020.12.29 |
노루목이라는 곳 / 송진권 (0) | 2020.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