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달팽이와 집 / 이설야

주선화 2024. 9. 14. 06:57

달팽이와 집

 

-이설야

 

 

자물쇠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집

달팽이가 사네

쓸쓸하게 부푼 말들을 담은 헐거워진 위장

달팽이가 배를 밀며 수도관을 따라가네

집의 헌 문들을 하나씩 열며

눈들을 하나씩 닫으며 기어서 가네

기어이 가네

달팽이가 눈물을 흘리던 집

 

이 집에서 끝까지 가본 길은 아직 없다네

서랍에서 덜컹덜컹 나사못이 빠지는

오늘도 슬픔을 하나씩 발굴하며

얼굴에서 구름이 다 뭉개질 때까지

어둠을 배우지

 

같은 눈을 뜨듯 천천히

칠이 벗겨진 대문 위를

달팽이가 지나가네

끈끈한 눈물로 안개를 섞어 칠하며 가네

 

칠이 끝난 달팽이

햇빛에 등을 말리다가

대문을 겨우 빠져나가네

폐가들이 조금씩 주저앉는 골목길을

천천히 가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