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다리가 긴 빗방울들 / 안주철

주선화 2024. 9. 15. 11:07

다리가 긴 빗방울들

 

- 안주철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에요

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또 웃고

또 혼자 웃으면

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

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

한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

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가면서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올린 절벽에서 떨어져

이 세상에서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팔이 길어지지 않아서 밥을 차려먹지 않았어요

다리가 짧아져서 일어나는 일도 큰일이 되어버렸고요

 

한강을 건너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천천히 하늘을 내려오는 생각에 갇혀있어요

밤에 팔이 조금 길어지면 창문을 닫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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