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꽃샘 / 성선경

주선화 2024. 10. 28. 09:45

꽃샘 (외 1편)

 

- 성선경

 

 

그 모든 시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건 꽃샘

이제 막 눈 뜬 꽃망울 다 안다

푸릇푸릇 보리밭도 서릿발

중늙은이도 얼어 죽는데

하마 저 어린 것들이야

나를 잡자고 날을 잡았나?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걸

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저 매화도 어딘지 언 볼이 심상찮은데

갓 핀 봄날이야 물어 무슨 답 있으랴

수풀 속 복수초는 복수초대로

울 밑의 개나리는 개나리대로

큰 추위는 이제 다 갔다 그랬는데

한 줌 햇살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 지경

그 모든 시샘 중에서

가장 고약한 건 꽃샘

한 뼘 햇살에 목을 내밀었다 이 지경

나를 잡자고 날을 잡았나?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걸.

 

 

 

풀등

 

 

 

잊었다 말한다고 다 잊힌게 아니라고

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그녀의

훌쩍이며 돌아서던 뒷등 같은 것

여기 있다

비 온 뒤 맑은 바람이 불 둣

가슴을 적시는 기억의 서늘함이여

바다 속 고래가 잠시 물 밖으로

호흡을 위해 등을 보이 듯

뿜어 올리는 저 빗살

잊힌다고 다 잊힌 게 아니라고

문득 문득 돌아서서

아직도 훌쩍이는 그녀의 울음소리

나직이 귓전을 때릴 때

오직 내게만 보이는 네 등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등

 

자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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