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차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은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넣었을까
누가 밀어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치욕스럽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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