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 이승희

주선화 2025. 3. 6. 07:41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차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은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넣었을까

누가 밀어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치욕스럽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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