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26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나뭇잎 피어날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 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 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 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니..

대치 / 김영미

대치 -김영미 마당 그네에 앉아 다리를 흔든다 다리를 흔들 때마다 그네가 간지럽고 간지러움처럼 구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먼 산에서 시작한 비가 가까운 산으로 온다 천변으로 온다 멀리서 가까이로 비가 다가온다 담 넘어까지 도착한다 그네 앞까지 오면 얼른 뛰어가야지 손을 머리에 얹고 찰박거리며 도망가야지 하지만 비는 담 너머에서부터 더 다가오지 않는다 이상한 비야 힘껏 구르면 발끝이 젖을 것도 같지만 비의 세계에 닿을 것도 같지만 비와 나는 마주보고만 있다

미조항 / 정진혁

미조항 -정진혁 돌아오는 모든 날들은 방풍림 후박나무 사이를 지난다 모르는 생각을 베고 누우면 미조항 골목 어디엔가 버리고 떠나온 옛집이 있을 것 같다 오래된 마당 오래된 우물 오래된 부모 오래된 대추나무 봄에는 미조항에 가서 입 잃고 눈 잃고 길 잃기를 아름다운 생 하나 후박나무 아래 서 있기를 어느 생으로부터 눈물이 흐른다 온 생을 밀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야 미조항은 있는 것일까 미조彌助가 피었다 전생처럼

그 여자의 레시피 / 박길숙

그 여자의 레시피 -박길숙 생물학적인 여자가 곰국을 끓인다 수컷을 그냥 끓이면 아 무 맛이 없다 잡놈을 섞으면 훨씬 역동적인 맛이 난다 수컷 의 피는 음탕하여 몇 번이고 핏물을 우려낸다 그의 이력을 추출해 낸다 음모를 미리 제거해 두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 으키는 음모를 낳는다 끓어 넘치기 전에 모두 싹둑, 깍두기 를 깍둑거리고 곰들을 모두 발바닥에 감춘다 생물학적으로 단련된 그의 근육, 팔랑거리던 얇은 귀, 행방이 모연한 퇴직 금을 뭉근히 끓여 낸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기까지 오래 기 다릴 것 가죽을 벗기고 고집을 꺾어 살점을 발라낸다 무릎 꿇은 복종의 도가니가 녹아내릴 때까지 성급히 불을 끄지 말 것 여자는 생물학적인 수컷을 한 그릇 말아 먹고 집을 나선다

이사 2 / 서진배

이사 2 -서진배 셋집으로 이사하고 너는 가장 먼저 묻는다 이 집에도 못을 마음대로 박을 수 없겠지? 너는 벽을 똑똑 두드리며 사나운 벽과 순한 벽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우리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못이 튈까? 망치로 못을 때릴 때마다 눈을 감으면서도 오 래 때릴 수 있는 우리의 벽을 가진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는 셋집에서는 우리의 액자를 높은 곳 에 걸지 못하고 바닥에 기대어 놓아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액자 속에서도 어깨를 기대는 버릇이 있는 거라고, 왜 우리는 이미 박혀 있는 못에만 시계를 걸어야 하냐고, 이 집에 세 들어 살다 간 사람들은 왜 같은 높이에 걸린 시간만 살다 가야 하냐고, 우리가 새로 못을 박는다면 집을 떠날 때, 새로 박은 못을 모두 빼고 떠나야겠지..

흥얼흥얼 / 서진배

흥얼흥얼 -서진배 어떤 슬픔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파란 사과 한 알을 쥐고 장례식장 안을 뛰어다니는 어린 상주가 있는가 하면, 벽에 기대어 흥얼거리는 어린 상주의 엄마가 있습니다 너무 어린 슬픔이거나, 너무 아린 슬픔이거나, 슬픔이 눈물을 따라가야하는데, 과일가게 간판에 한눈팔거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가 본 길인데 길을 잃고, 어떤 슬픔은 갈 때마다 길을 잃고, 당신의 슬픔이 길을 잃어 당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가 흘러나올때, 나는 당신의 슬픔을 따라 길을 잃고, 당신의 흥얼거림을 따라 흥얼거립니다 당신이 흥얼거리는 노래마저 길을 잃고 한 멜로디를 맴돌때, 나도 그 멜로디를 따라 맴돕니다 무슨 노래인지 묻지 않으면서, 무슨 슬픔인지 묻지 않으면서, 한 흥얼거림이 한..

민화 / 성선경

민화 1 - 성선경 작약 한 그루 모란인 줄 일았다 그래도 태연작약 함박꽃이라 그래도 태연작약 구십을 넘긴 할아버지처럼 구십이 다 된 할머니처럼 한낮의 햇살 아래 태연작약 나는 아직 못 가 본 저 세계 참 환하다. 민화 2 된장 맛은 뚝배기라고 똑똑한 년 예쁜 년한테 못 이기고 예쁜 년 돈 많은 년한테 못이기고 요즘도 어디 화롯불에 된장 뚝배기 올려놓는 집 있다 세상도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 돈 많은 년 아들 잘 둔 년한테 못 이기고 니 참 잘났다 된장을 한 숟갈 퍼먹으며 제발 빈다, 아들아! 니 꼭 성공해라. *성성경 시집 ㅡ 파란시선

처음으로 / 황강록

처음으로 -황강록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이런 어색한 일은 될수록 피해 왔었다 아버지는 밥을 차려주었고 나는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단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될수록 피하고 싶은 어색한 일 이었다. 가급적이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바쁘고--- 그렇게 얼떨결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일 아버지는 늙은 얼굴만 빼고는 몸이 모두 낡은 기계로 되어 있었다. 삐걱거리고 균형 을 잘 잡지 못했다. 무척 오랫동안 그 불편한 기계로 험한 일들을 해왔었나 보다. 당연히 구식의 기계로는 밥을 맛있게 차릴 수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 혼자서 밥을 찬찬히, 맛있게 차려 본 적이 없기도 할 테고 --- 아버지가 차린 맛없는 밥을 우린 말없..

기린 여자 / 조정인

기린 여자 -조정인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짚으며 멈추는 여자가 있다 앞사귀를 따 먹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젖힌 목과 이마에 흰 갈분 같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플 안쪽, 눈동자엔 더는 물상이 맺히지 않는 사람 중도시각장애자 A는 하늘을 잊지 않으려 새를 잊지 않으려 빈 허공에 거듭, 옥빛 하늘을 들이고 새를 날리지만 어둠 속에서, 어둠에 그리는 별들은 모서리를 잃어간다 ㅡ내 이름은? 그이는 지금 소리예배소에 들어 귓가에 뒤척이는 바람으로 아가위나무를 읽는 중이다 아가위나무 작은 잎들이 빠르게 바람을 팔락거려 아가위나무를 출력한다 흰 지팡이와 공명하는 바닥을 골똘하게 듣는 발이 지표면을 더듬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긴다 수피를 어루만지는 손끝이 음악을 일으키는 오월, 아침고요수목원 나..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 마경덕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마경덕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습니다 자극이 없으며 그저 냄비는 냄비, 물은 물일 뿐입니다 예민한 양은 냄비는 한 방울 두 방울 수면으로 기포를 끌어올립니다 물의 껍질이 톡톡 벗겨지고 있습니다 맥박이 뛰고 물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격렬해집니다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물의 탈피는 가화氣化, 아니 우화입니다 물은 날개를 달고 증기는 천장까지 날아오릅니다 건조하고 까칠한 실내 공기가 촉촉하고 말랑해집니다 한 바가지 물이 반 컵으로 졸았습니다 냄비는 바짝 수위를 낮추고 물의 입자들이 빠르게 창밖으로 증발합니다 이곳을 탈출해 구름이 되려는 물의 체위는 순항입니다 지금 물의 기분은 최상입니다 완벽하게 존재를 지우고 하늘의 품으로 달려가는 중입니다 탈피를 마친 물은 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