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21

소리가 사라지다 / 소영미

소리가 사라지다 (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대전 시 당선작) -소영미  아버지 통로가 끊겼다전화가 답답해 찾아가도 여전히 멍한 눈빛읍내 금강보청기에 모셔갔다전직 유도선수였다는 사장 무뚝뚝하게노청입니다노안과 같은데 안경은 당연하게 쓰고 보청기엔인색하지요귀가 안경 쓴 거와 마찬가지랍니다삼백이 넘는다는 말에 입을 벌린 어머니와 나를무심한 눈으로 쳐다본다손을 내저으며 자꾸 나가시려는 아버지무슨 일이 급한 듯문밖이 바로 논인 듯 바깥으로 나가신다그렇게 우렁차던 아버지가 소리하나 잡지 못하다니소도 잡던 그 힘가수보다 목청도 좋았는데신바람도 잡아서 휘파람으로 날려 보내던 아버지귀도 잘생겨 오래 살 거라고 흐뭇해하던 할머니그런 귀가 사라졌다 대화가 달아난 아버지 늘 혼자다어머니도 동네사람도어떤 소리도 잡..

꿈을 수선하다 / 윤희경

꿈을 수선하다 (2023년 경북일보청송문학대전 수상작) -윤희경  내 안에 비가 내리고 나는 그 비에다물을 푸는 중이다 자기 전엔 사막을 걷지 말라는 말잠덧은 모래알이라서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서잠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꿈은 올라갈 수 없는 니무라는 말무른 무릎으로 엄두가 안 나서,꿈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떨지 마, 추위도 부플어 올랐다가털썩 꺼지기도 해,꿈을 둥지라고 불러볼까머리맡이 환해지게 어떤 마을은 액자로 걸어 두었어벽을 두드려도 모른 척해서,오래된 약속들이 떠나버려서,참, 그때 누가 꿈을 찍어두었더라 떫은맛이 계단 꼭대기에서 툭!데구루루루,작은 꿈들이 채 익기도 전에 깨져버렸다잠들어있는 조각은 조심해야 해! 꿈의 소매를 꿰매고, 꿈의 밑단을 잇대어다시 일구자고 했더니,뜯어진 잠들이 달려와꿈속을 꼭..

빌린 슬픔 / 신용목

빌린 슬픔 -신용목  닫히지 않는문,언젠가 모텔에 가서 보았지, 투명해서닫아도 닫히지 않는 욕실의 그문, 알몸이 후회처럼 비치는문, 집이 있어서빌려주는 집도 있는 거라면 빌려주는 잠도 있는 거라면, 빌려주는슬픔도 있어서창 너머 달 알겠네, 세상의 동전들이 왜 하나같이둥근 것인지 세상의 저녁이 왜지폐처럼, 한 장씩 지울 수 없는 얼굴을새겨놓는지 버릴 수 없는지 여기는 갯벌이 있고, 갯벌에 박힌 배가 있고물이 들면저만치서 달이 건너옵니다. 나는 모텔욕실에 걸린 수건 한 장을 들고 나와,출렁이는 달에 손을 담가배를 놓아주고젖은 손을 닦습니다. 배가 풀어놓은 흰그늘을 적셔 갑니다. 바다를 빌려 갑니다. 얼굴을동전처럼 던져 놓고 모텔로 돌아와 달처럼 수건을 걸어놓습니다.

너도바람꽃 / 정진혁

너도바람꽃 -정진혁  산기슭에서 만났다오후가 느리게 떨어지는 동안저녁이 모이고 모였다너도바람꽃 불러 보다가고 이쁜 이름을 담고 싶어서 손가락으로 뿌리째 너를 떠냈다산길을 내려오다 생각하니네가 있던 자리에뭔가 두고 왔다 너도바람꽃은아직 바람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다가어둠 속에 저 혼자 꽂혀 있을 손길을 생각했다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 빗소리가 비스듬히 내리는 밤이었다

백 년도 더 된 아주 작은 동그라미 때문에 / 이 원

백 년도 더 된 아주 작은 동그라미 때문에 -이 원  어제 간 곳에 오늘 또 가야 한다 유리 진열장은 세 칸이었다몸 하나가 겨우 지나갈 틈으로 들어가면맞은편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같은 진열장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무릎을 접고 있다가 맞은편의 눈과 마주쳤다 여기요저 은색 좀 보고 싶어요백 년도 더 된 그것 맞지요? 반대편의 그것은 쉽게 내 손에 놓였다 여기 은색 속 이 작은 동그라미 지워질까요?세정제로 닦으면 지워질까요?무엇으로 닦으면 지워질까요? 안 지워져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아 선물할 거라서요 이미 펴고 있던 무릎 뒤에 힘을 주고야 알겠어요돌아 나오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색을 떨어뜨리면그 백 년도 넘은 작은 동그라미는 가려질텐데 유리 진열장 안에모래시계 만년필 연필가죽 필통 중간중간 크리스마스..

여름궁전 / 성영희

여름 궁전 -성영희    폐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매일 바람으로축조되었다 저녁이면 무너지는 여름궁전은 물에 뿌리를 둔 가업만이 지을수 있다. 젖은 것들이 마르는 계단, 셔츠는 그늘을 입고 펄럭인다.   몸을 씻으면 죄가 씻긴다는 갠지스 강 기슭에서 두들겨 맞다 이내 성자처럼 깨끗해지는 옷들, 어제 죽은 이의 사리* 를 계단에 펼쳐 놓고 내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헹구는 도비왈라들, 거품 빠진 신분들이 명상처럼 마르고 있다.   이 강에서 고요한 것은 연기 뿐,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밤이면 강물은 다시 태엽을 감고 소리를 잃은 것들은 물결이 된다. 화장장의 연기도 무시로 강물 따라 흐른다. 앞 물결과 뒷 물결이 섞여 흐르는이곳에 오늘이 있고 산 자만이 빤 옷을..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는 무언가가 모자란다.혹동고래 같은 것이베네수엘라의 외로움 같은 것이 나도 모르게 세포분열을 하거나결승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는 것이다.그것이 침울한 영혼에 가깝다고 삶에 가장 가까운 어둠이란엑스트라 배우가 카메라 조명을 벗어나무심히뒤를 돌아보는 순간진단을 받고 치료를 포기하고 혼자 깨어나천장을 바라보는 새벽 어둠이란 지도 위의 한 점이 아니다.수평선이 아니다.죽은 뒤도 아니다.단지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 가까운 우리는 결국 시제가 없는 편지를 쓰는 것이다.여행자란 결국 돌아오는 사람인가?나는 당신의 조금 더 먼 곳에 도착함이제 돌아가지 못함과 같은 문제로 베네수엘라에 가보지 못했는데도새벽의 어둠 속에는 여행자들이 떠돌고 있다.혹동고래가 배를 보인 ..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김성규  이를 빼고 난 후 혓바닥으로 잇몸을 쓸어 본다말랑말랑하다 물고 있던 거즈를 뱉을 때 피 냄새살고 죽는 것이 이런 것들로 이루어졌구나내 삶이 가진 말랑함 어린 강아지를 만지듯 잇몸에 손가락을 대 본다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 뜯으라고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그러니 그들은 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제는 살고도 죽고도 싶지 않은 나이오늘도 나는 시장에 간다 뺀 이를 다시 사고 싶어그러나 내 잇몸에 맞는 것은 없고구름이 핏빛 솜뭉치로 보인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울고 있는 갓난아이와 유모차를 밀며늙어 죽어..

소리설치가 / 석미화

소리설치가 -석미화  힘들겠지만 가장 아팠던 상처를 편안하게 흥얼거려 보시겠어요 그녀는 수십 개 선을 내 몸에 설치해 놓고 늑골에 묻힌 소리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여음여치나 찌르레기처럼 나에게도 숲이 생긴 것을 알았다 반대로 말해볼게요행복한 시간에도 남아있는 아픔을 한번 끌어내 보세요 신은 우리가 힘들면 노래하도록 만들어 놓았을 거예요숲에서 이슬이 만들어지는 시간 같은 거예요 신이 신나게 거짓말을 하는 듯 바닥과 천장이 단단하게 허공을 짓는 듯그녀와 내가 앉은 자리에 사이프러스 잎 소리가 들렸다 추운 곳에서 견뎌낸 나무들은 악기의 음색이 어둡고 깊지요 내 몸에 부착된 선들이 가지를 뻗으며 마른 잎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숲을 걷어낼 거예요눈을 한 번 감았다 뜨세요 먼 곳에서 그녀가 나를 깨우고 있..

그 계단 / 마경덕

그 계단 -마경덕  내 상처의 목록 맨 앞줄에 가파르고비좁고 어둑한계단이 있다 그 계단 끝에는 한참을 망설이던 전당포가 있었다 이것저것 캐묻는 낯선 사내에게훔쳐 온 물건 꺼내듯결혼반지를 내민 손이 떨고 있었다 보랏빛 사파이어 반지 하나가불안한 표정으로 철창 안 주인을 쳐더보았다 "만원 쳐줄게요" 결혼 패물과 아이 돌반지는 시어머니 몰래 다급한큰언니 손으로 넘어가고남편도 모르는 약속 하나는 끝내 내게 돌아오지 못하고그날 두 번째 비밀이 추가되었다 아이 손을 잡고 내려올 때손등에 떨어진 눈물이 보석처럼 반짝 빛났다 청량리 역전 어디쯤, 영혼까지 저당잡힌 그 전당포에춥고 어두운 계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