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당선작

주선화 2019. 5. 23. 12:24

은종




자동차 룸미러에 은종이 달려 있다. 은종은 아무런 종교도 뜻하지 않는다.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면 은종도 희미하게 짤랑거린다.


영원을 불러들이는 가벼운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창에 이마를 댄다.

길게 누워 감기를 달래고 열을 식히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차를 아반떼로 바꾼다. 은종은 사라진다.


나는 지금, 르망을 타고 가족끼리 설산을 몰랐다던 어느 날을 상상하고 있다.


아버지가 말해주던 그날의 이야기엔 은종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제 믿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게 되었다.

버스를 타다가, 지하철을 타다가, 사고가 나게 해주십시요.

불쑥 기도하지 않는다.

인기척에 놀라 뒤를 돌아보면

텅 빈 자리에 햇살이 고여 있다.


은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돌아볼 때마다 짤랑짤랑 엷은 소리로 울린다.


그러나 은종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나는 반짝이는 귀를 두 손으로 감춘다.




블루, ―루



극장에선 손뼉이 창문에 역할을 한다. 갈채가 계속 되고

관객들은 저마다 파닥거리는 새를 창 밖으로 날려 보내지

실내가 흰색 깃털로 가득하다 아나타는 무릎에 두 손을

포개고 있다


세 번째 반복되는 커튼콜


동료 배우들에게 등 떠밀린 조연 배우가 주춤주춤 손뼉을

따라 치면서 등장한다 갈채가 어색해진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무슨 역할을 맡은 배우지? 아나타는 만져보고 싶

다 날아갔다 돌아오고 돌아왔다 날아가는 저 조연 배우의

새를, 머리와 부리를 박수가

멎어버리기 전에


아나타의 챙이 넓고 근사한 깃털 모자와

봉긋한 물방울처럼 통통한 조연의 새, 암녹색 꽁지깃을 가진


아나타는 주의 깊게 응시한다 저 인기 없는 배우의 새를 말

이에요 새의 왼쪽에서 서서 블루라고 부르고 오른쪽에 서서

블―루라고 듣는 상상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부드럽게 쓰다

듬으면서 좋을 것 같지 그런 순간을 위해 아나타는 자신의

 무릎에 조그마한 둥지를 만들었을까?

손뼉도 악수도 유보해 온 건가 생각해본다


무명 배우 새는 날개를 접고 무대 위에 선다

새의 부리가 묶어 있다


다각도에서 여러 채도의 푸른빛으로 반사되는 깃털과 새에게

서 풍기는 희미한 초록 아우라

이 새의 특별함을 아나타는 알아볼 수 있지만 실은 무대 뒤에

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분장실은 멸시에 찬 폭소가

만연하겠고요

조연 배우의 납작하게 찌그러진 자조 어린 웃음


아나타만이 오직 할 수 있다 블,루 블―루를 제대로 다루는 일

밤마다 블루는 납작한 깃을 쫑긋 세우고, 블―루가 낮에 들은

무시의 말들을 되풀이했겠지 블―루의 입으로 비틀비틀 말이

야 날개를 펼쳐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어느 쪽이 창밖

인지 안쪽인지 알 수 없는, 조연 배우가 모습을 비춰보려 하

면 종종 텅 비어 있고 하던 거울처럼


둥글고 매끈매끈한 저 새의 이마

아나타는 블루, 블―루를 관찰하다가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열 손가락을 펼친다

끝없이 펼쳐지는 금빛 모래사막

블루, 블―루를 제외한 나머지 새들은 모래사막의 저편으로 날아간다


그러자 미련 없이 창문을 닫아버리는 관객들 코트와 짐을 챙겨서 떠

나간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하얀 깃털들이 신발에 밟혀 더러워지고

극장 로비에서 왁자지껄 사진 찍는 소리, 너스레와 웃음소리와 감탄

의 말들

반면 극장은 점도 높은 침묵으로 끈적거린다

인가 없는 배우가 무대에 덩그러니 서 있다


아나타가 천천히 인기 없는 배우에게 다가간다

블루, 블―루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부른다


그녀의 근사한 모자에 꽂힌 수수한 깃털이 살며시 흔들리고


오늘 아나타는 같은 모자를 열두 개 살 것이다




미모사



포트에서 차가 끓고 있다


들꽃을 발로 차고 다니는

몹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손님이 말했다


나는 하얗게 센 민들레를

불지 않고 발로 차서 날려주었는데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은 나를 몹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왜인지 그건 내가

그동안 나를 탁월하게 변명해 왔다는 증거 같아요


잎이 움츠러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모사 같은 사람에게

민감함이 건강함일까요


손님은 자리에 일어나

사진기를 꺼내든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감추고

포커스

뒷걸음질해야만 보이는 풍경 있듯이

움츠러들 때만 안길 수 있는 게

자신의 품속이라면


나는 모르겠다


내가 왜 어지러웠는지

무서웠는지

왜 홀씨처럼 회전 했는지


그들의 찻잔을 꺼내고

언제였던가

자란 손톱을 쥐구멍 앞에 흩뜨려놓은 적이 있었지

딸 같은 내가 피어나길 기대하며


저녁 어스름 속에서 손님과 차를 마신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새하얀 수증기


창박이 있어 다행이다

불빛도 있고

총총히 걸어가는 모르는 사람


차갑고 매끈하다

나는 천천히 탁자에 엎드린다


감은 눈 속으로 모여드는 식물들


발길질당한 자리부터 사라져가는 흰 얼굴


*유진목시인, "꽃을 봐도 발로 차버리는 못된 사람이 있잖아요"애서 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