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7

어쩌다가 만났을까 / 김 언 감상 / 김정수

어쩌다가 만났을까 ㅡ김 언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을 생각한다. 저녁에 나가서 아침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둘이 만나는 경우는 아침이나 저녁 이 둘뿐이지만, 만나기는 만난다. 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이 인사한다. 둘은 아직 부부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음에는 언제 만날까? 약속을 정하지 않는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과 저녁에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만난다. 만나기는 만난다. 어쩌다가 우리는 만났을까? 감상 ㅡ 김정수 세상에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부부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가늠하기 어려운 확률인지라 그저 인연이라 생각할 뿐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기르면서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 좋은 날보다 '지지고 볶는' 날..

시선 2021.11.20

빚 / 최동은 감상 / 곽재구

빚 최동은 백일홍이 피었네요 이 백일홍은 언제 피었죠 백만 원을 빌린 마음처럼 요렇게 빨갛게 백일홍백일홍백만원백만원 그러니까 백만 원이 백일홍처럼 들리네요 빚은 한 번에 늘어난 게 아니죠 꽃이 피듯 서서히 피어나죠 이자도 처음부터 많아진 게 아니구요 백일홍 백 송이도 한꺼번에 피었다 지지 않죠 한 송이가 지면 한 송이가 오고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오고 분홍색이 가면 하얀색이 오고 파란색이 가면 자주색이 오고 그 많은 백일홍이 잘못이 없듯 백만 원도 잘못이 없죠 그저 꽃잎을 몇 장 빌린 것뿐이죠 밤새워 백만 원을 세듯 한 잎 두 잎 세면 셀수록 피어나는 게 이자죠 그러니까 이자는 생각하지 마세요 저기 봐요 폭발하듯 꽃들이 피고 있잖아요 꽃망울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감상 ㅡ곽재구 마음이 아픕니다. ..

시선 2021.11.14

파도의 기분 / 임수현 감상 / 허연

파도의 기분 ㅡ임수현 바다에서는 누구나 웅크리는 법을 알게 된다 고기잡이 배들이 해안선을 그렸다가 지운다 해변에 오면 사람들은 신발을 벗어 들 준비가 되어 있다 벗어 둔 신발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신발을 생각하지 않는다 수평선은 수평선에게 파도는 파도의 기분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밀려가고 있었다 모래처럼 부서진 기분을 뭉쳐 파도에게 주었다 웅크린 몸을 펴 벗어 둔 신발을 집어 들면 맞잡은 두 손에는 계절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대로 괜찮다 바다에서 돌아와 바짓단을 펴면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파도가 내게 모래를 한 움큼 넣어 주었다 감상 ㅡ허연 바닷가에서 파도를 마주하면 나는 작아진다. 거대하고 유장한 파도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된다. 파도가 밀려오면 내 마음은 밀려나고, 파..

시선 2021.11.13

가을 손 ㅡ 서시 / 이상범 감상 / 나민애

가을 손 ㅡ서시 ㅡ이상범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감상 ㅡ나민애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 없고, 남들에게 배풀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인생을 보라. 가는 게 있어도 오는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분명히 줬는데 남들은 기억도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준 것과 받은 것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미움이 깃든다. 내 마음의 시간, 재물과 돈을 가져..

시선 2021.11.10

감상 / 박소란 평설 / 박남희

감상 ㅡ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평설 ㅡ박남희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서정성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박소란 ..

시선 2021.11.09

고 최정례시인을 그리워하며

늙은 여자 ㅡ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사진 (최민식)사진작가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붉은 밭 ㅡ 최정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푸른 골짜기 사이 붉은 밭 보았습니다..

시선 2021.01.20

[경남신문] 시가 있는 간이역 <받아둔 물> _ 주선화

[시가 있는 간이역] 받아둔 물 - 주선화 기사입력 : 2020-09-24 08:07:41 밥물은 전날 받아둔 물로 한다 미리 받아둔 순한 물이다 화를 가라앉힌 물이다 찻물이나 화분에 물을 주어도 순한 물을 쓴다 순해지는 나이를 지나고 보니 두둑한 땅 아래로만 흐르는 이랑 물인 거 같고 나는 여전히 악,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넌지시 바보 소리나 듣는 그저 그렇게 받아둔 물인 거 같고 ☞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 있다. 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계속해 보탠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러한 물의 본질적 힘을 우리는 지난여름 긴 장마로 경험을 했고, 아픔 또한 겪었다. 그런데 마음이 순해지는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화(힘)를 가라앉힌 물’로써 가족과 지인들을 위한 밥을 짓고 차를..

시선 2020.12.12

[주강홍의 경일시단] 받아둔 물

[주강홍의 경일시단] 받아둔 물 경남일보 승인 2020.11.29 16:58 받아둔 물 -주선화 밥물은 전날 받아둔 물로 한다 미리 받아둔 순한 물이다 화를 가라앉힌 물이다 찻물이나 화분에 물을 주어도 순한 물을 쓴다 순해지는 나이를 지나고 보니 두둑한 땅 아래로만 흐르는 이랑 물인 거 같고 나는 여전히 악,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넌지시 바보 소리나 듣는 그저 그렇게 받아둔 물인 거 같고 ----------------------------------------------------- 노자의 도덕경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다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에서의 물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 온유하고 스스로를 낮추며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수평을 맞추고 장애물에 비켜 갈 줄도 아는 지혜는 물론 넘쳐서 거룩히 분..

시선 2020.12.12

[시가 있는 아침] 받아둔 물 _단디뉴스

[시가 있는 아침] 받아둔 물 천지경 시인 입력 2020.12.07 14:01 받아둔 물 주선화 밥물은 전날 받아둔 물로 한다 미리 받아둔 순한 물이다 화를 가라앉힌 물이다 찻물이나 화분에 물을 주어도 순한 물을 쓴다 순해지는 나이를 지나고 보니 두둑한 땅 아래로만 흐르는 이랑 물인 거 같고 나는 여전히 악, 소리 한번 하지 못하고 넌지시 바보 소리나 듣는 그저 그렇게 받아둔 물인 거 같고 천지경 시인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면서부터 나는 순해지지 않고 악바리로 변했다. 힘든 삶이 자꾸 나를 악하게 만든 것 같다. 돈돈돈, 돈의 노예로 살았고, 재산 한 푼 물려주지 못한 부모님의 무능함을 원망하며 살아왔다. 이제 아이들을 제 둥지에 앉혔으니 화를 가라앉힌 순한 물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광활한 우..

시선 2020.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