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57

면사무소 / 정상미

면사무소 ㅡ정상미 도시에도 면이 있다 그 사무소 북적댄다 분주한 와중에도 직원은 고작 한 명 아무리 기다린대도 불평불만 전혀 없다 면장의 주 업무는 걸쭉한 맛 우리는 것 들깨향 업은 욕이 구수하게 녹아들 때 예저기 터지는 웃음보 커튼콜은 덤이다 국숫집 면장님은 비요일이 더 바쁘다 찔끔 눈물 흘려대는 하늘도 그녀 단골 욕먹고 후련해지는 발걸음들 가볍다

시조 2022.01.24

검정 봉지 속사정 / 곽종희

검정 봉지 속사정 ㅡ곽종희 바리바리 싸서 주신 귀향길 반봇짐에 아껴두신 씨감자가 반갑게 날 맞는다 진즉에 물렸다는 말 목울대에 걸리는데 이밥은 못 먹여도 배곯게는 않겠다던 어머니 모진 다짐 버짐같이 번진 날에 그 속내 모르던 나는 양지 녘에 쪼그리고 베란다에 쳐박아 둔 봉지에서 싹이 났다 쭈글쭈글 몸피에서 피워낸 어린 싹이 죄송한 느낌표 하나 나 대신 치켜든다

시조 2022.01.19

동막역 3번출구 / 정상미

동막역 3번출구 ㅡ정상미 동막이란 말에는 풀 냄새가 배어나 기울어진 나를 수선하고 싶을 땐 연둣빛 출구를 따라 내일을 박음질해 봐 숨 가쁘게 살았으니 한 번쯤 뒤돌아보고 창 너머 다른 세계 걸어보고 싶다면 풀 언덕 기다려주는 동막으로 오면 돼 창업 교실 창작 교실 그곳은 인생 수선소 물러나 쪼그린 무릎 다시 일으켜 세우지 동막엔 사철 봄바람 꺼진 삶도 불이 붙지

시조 2022.01.07

202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삭제하다 ㅡ전영임 누구 하나 기별없는 전화기를 매만진다 두무지 알 수 없는 번호들을 지운다 절두산 망나니 손이 칼춤 추듯, 칼춤 추듯 삭제한 낯선 이름 온 저녁을 붙잡는다 단칼에 날린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아뿔싸, 목을 벤 후에 도착한 어명 같은 산다는 핑게 속에 까마아득 잊혀져간 나는 또 누구에게 삭제될 이름일까 희미한 번호를 뒤져 늦은 안부 묻는다

시조 2022.01.05

사설시조 모음집 참깨꽃 머슴살이 (외)

참깨꽃 머슴살이 ㅡ홍준경 큰누이가 귀동냥해 준 참깨꽃 이야기야. 가진 논밭 한 뙈기 없고 뒷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 딸린 권속 많은 나이 어린 가장이었던가. 울며 겨자먹기로 바람처럼 머슴살이 떠날 수 밖에. 그런데 말이야, 참말이지 겨울나무 봄풀하기 보리타작 안 해 본 일이 없고, 무논심기 끝내고 조금은 한가한 계절이 오면 참깨꽃 속없이 흐드러진 게야. 이 무렵이면 머슴 밥상에 고봉밥을 줄이고 찬거리를 하나씩 뺀다는데 왜 그러겠어? 나갈 테면 나가라는 게지. 참으로 미치고 환장할 '갑'의 착취, 지독한 자린고비 수전노였던 것 같아, 그 서러운 보릿고개에..... 절반의 새경 받고 얼마나 원망하겠어, 그 참깨꽃을. 바람이 그린 그림 ㅡ문수영 빗속에 바람 침 들어있는 줄 몰랐다 벚꽃 다섯 장 오롯이 ..

시조 2021.12.03

단시조 읽기

미궁 ㅡ 박기섭 끈 풀린 신발 한 짝 길섶에 버려져 있다 미차 수습지 못한 짧은 비명의 흔적 다급히 오그라붙은 캄캄한 저 바큇자국 목련 ㅡ 이근배 누이야 네 스무살 적 이글거리던 숯불 밤마다 물레질로 뽑아 올리던 슬픔 누이야 네 명주빛 웃음이 눈물처럼 피었다 벽壁 ㅡ 겨레여, 한반도여 ㅡ 이정환 이룰 수 없는 만남이 이루어 놓은 고요 돌로도, 무지개로도 어쩌지 못할 고요 수천만 새 떼들이 부딪쳐 피 흘리며 세운 고요 늦저녁 ㅡ 정수자 거기 혼자 밥 먹는 이 등에서 문득 주르르륵 모래 흘려내려 어둠 먹먹해져 지나던 소슬한 바람 귀 젖는다 嗚沙........ 덩굴 손 ㅡ 최영효 엎드려 기어가리 기어서 울어가리 맨손 맨발로 나서 맨몸으로 죽어가도 내 청춘 땅을 가르고 벌거숭이로 왔듯이 섬 ㅡ 홍성란 멍든 섬을..

시조 2021.09.09

단시조 읽기

열쇠 ㅡ 이송희 너는 이미 떠났을까 단단하게 잠긴 안쪽 지상의 암호들도 서성이다 돌아갔나 비틀면 열리던 사랑 등 돌린 채 말이 없다 여의도 벚꽃 ㅡ 김민서 민생이 표류한다 꽃송이에 닿지 않고 공수표 꽃잎들 하르르 휘날리는 꽃놀이 여의도에선 짓이겨진 공약만 달팽이의 생각 ㅡ 김원각 다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너무 큰 집 ㅡ 민병도 적막에 턱을 괴고 살구꽃 환한 봄날 혼자 남은 아버지가 바가지에 쌀을 씻는다 이승의 남은 집 한 채, 새소리도 끊겼다

시조 2021.09.09

너라는 비밀번호 / 정상미

너라는 비밀번호 ㅡ 정상미 너를 열 땐 언제나 처음부터 진땀이 나 쳇바퀴 다람쥐처럼 단서들을 되짚는다 비밀은 물음표 앞에 굳게 닫혀 덧댄 빗장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바뀌는 네 취향은 여기저기 흩어놓은 서투름과 내통해도 자물쇠 가슴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 네 날씨 풀어내려 구름 표정 살펴보다 숨겨둔 꽃대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불현듯 네가 열린다 꽃숭어리 활짝 핀다 햇빛 의자 속울음 번진 공터 의자 하나 누워 있다 슬픔을 배양하는 근심은 움푹해서 봄 입구 무료급식소는 한쪽으로 기운다 무너지는 무릎들은 어디서 쉬어야 하나 조그만 오두막은 끼니마다 리필이 돼도 그들은 오갈 곳 없어 오는 밤이 두렵다 햇살이 그려놓은 의자 위 오선지에 흔들리는 어깨가 음표로 와 누울 때 날마다 살아내는 비루, 왈츠로 일어선다

시조 2021.05.21

붉은 신발 / 김진숙

붉은 신발 ㅡ 김진숙 넘어진 삶을 일으켜 다시 사는 이 봄날 당신은 돌아왔지만 당신은 여기 없고 바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는 길들 짐승 같은 시간들 바람에 씻겨 보내도 눈물은 그리 쉽게 물러지지 않아서 행불자 묘역에 들어 아버지를 닦는다 닦고 또 닦아내는 사월의 문장들은 흩어진 신발을 모아 짝을 맞추는 일 아파라, 동백 꽃송이 누구의 신발이었나

시조 2021.05.20

페이스메이커 / 정상미

페이스메이커 ㅡ 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촛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사람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않고 앞을 밝히고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시조 2021.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