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집 / 조경선 잔칫집 ㅡ 조경선 남은 음식 버렸는데 잔칫집이 되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새들이 손님이다 저마다 산동네 소식 오늘만큼 분주하다 잘 차린 집밥이 새들도 그리웠는지 마당 안쪽 파낸 자리 둥글게 모여 앉아 제각기 안부를 물을 때 슬픔마저 정갈하다 새끼를 거느리는 마음이 바빠진다 음식을 먹다 말고 연신 물고 나른다 발자국 무수히 찍힌 어미의 저 몸짓 시조 2021.03.13
목력 / 조경선 목력 ㅡ 조경선 자르기 전 쓰다듬으며 나무를 달랜다 생의 방향 살핀 후 누울 자리 마련한다 첫 날刀은 이파리마저 놀라지 않게 한다 나이테 한 줄 슬금슬금 잘려 나가니 뱉어낸 밥 색깔이 뼛가루처럼 선명하다 100년의 단단한 숨소리 한순간에 무너지고 한없이 차오르던 숨길은 물길이었을까 안쪽으로 파고들며 내력은 촘촘해지고 울음을 간직한 옹이가 더욱 단단해진다 벌목은 베는 게 아니라 만나는 거다 커다란 눈동자 되어 밑동이 살아 있는 건 최초의 뿌리가 사람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시조 2021.03.13
어떤 우산 / 백윤석 어떤 우산 ㅡ 백윤석 후드득 빗소리에 대합실이 다 젖는다 쉼없이 비를 털며 들락대는 사람들 속 척추 휜 우산 하나가 구겨진 채 나뒹군다 한때는 온몸으로 빗줄기를 막던 그도 살대가 부러지면서 하염없는 잠에 빠지고 노숙의 차디찬 빗소리 꿈결인 듯 듣고 있다 일순, 그 안에서 꽃대 하나 일어선다 성긴 꽃 잎눈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비긋는 세상 밖으로 무릎걸음 걷는다 시조 2021.02.23
벗고 싶은 봄 / 조규하 (2021년 국제신문 시조 신춘문예 당선작) 벗고 싶은 봄 ㅡ 조규하 코로나 바이러스 마스크 5부제가 담쟁이 넝쿨처럼 담 벽을 둘러쳐도 빈손을 탈탈 털면서 제 집으로 가는 봄 내 맘이 네 맘이니 맘 편히 갖으란다 더불어 같이 갈까, 미래를 통합할까 정의를 공화하려는 선거판에 열띤 봄 한 끼 밥은 건너가도 맨입으로 못나가요 거리마다 입을 막고 거리를 두는 사이 우리는 서로 몰라요 각자가 따로지요 요일마다 수량 한정 봄날도 매진인데 선착순 이라는 말 불안하기 짝이 없어 언제쯤 입을 벗나요, 입술도 맞출까요 시조 2021.01.15
각북(角北)ㅡ 눈 / 박기섭 각북(角北)ㅡ 눈 ㅡ 박기섭 1. 각북(角北)에 눈이 왔다, 뿔이 다 젖었다. 행여나 귀 밝은 눈이 눈치라도 첼까 보아 햇볕을 조리차하여 언 콧등을 녹인다. 그렇듯 한동안은 음각의 풍경 속에 마을도 과수밭도 앞섶을 징거맨 채 안으로 번지는 먹물을 닦아내는 시늉이다. 2. 풍경이 다 지워졌다, 백색의 암흑이다. 겉장을 뜯지 않은 천연의 공책 한 권 먼 데서 경운기소리가 한 모서릴 찢고 간다. 밤새 흐르지 않고 두런대던 골짝물들이 얼겉에 생각난 듯 빈 공책을 당기더니 썼다간 찢어버리고 찢었다간 다시 쓴다. 시조 2021.01.08
너라는 비밀번호 / 정명숙(2021년 서울신문 시조 신춘문예 당선작) 너라는 비밀번호 ㅡ 정명숙(정상미) 너를 열 땐 언제나 처음부터 진땀이 나 쳇바퀴 다람쥐처럼 단서들을 되짚는다 비밀은 물음표 앞에 굳게 닫혀 덧댄 빗장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바뀌는 네 취향은 여기저기 흩어놓은 서투름과 내통해도 자물쇠 가슴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 네 날씨 풀어내려 구름 표정 살펴보다 숨겨둔 꽃대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불현듯 네가 열린다 꽃숭어리 활짝 핀다 시조 2021.01.07
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바람만바람만 / 정황수 닭잦추는 새벽까지 소실점 없는 거리 잉걸덩이 엄두마저 찬이슬에 스러지나 야속히 돌아누운 등, 그림자로 들썩이고 인터넷 창에 비친 닟선 얼굴 클릭하며 허방다리 너덜 세상 별 하나 잡으려는 덴가슴 저 페르소나 보폭이 너무 짧다 뿌리 잘린 소갈증에 말라.. 시조 2015.01.02
주민등록증 / 이우걸 주민등록증 / 이우걸 가느다란 가지 끝에 새처럼 앉아 있었다 가지들 흔들릴 때면 옮겨가며 앉아 있었다 옮겨간 그 가지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다 이제 남은 반백과 희미해진 지문 앞에서, 손 흔들 사이도 없이 빠져나간 시간 앞에서, 나라고 외치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상에서 .. 시조 2013.04.09
곰국/ 선안영 곰국 / 선안영 장작불에 끊여서 택배로 온 사골곰국 몇 번씩 우려내느라 어머니 병 않았을 분주한 시간의 뒤꼍에 우두커니 버려져서 상한 국물 버리는데 끌끌끌 혀를 차듯 하수도를 맴돌다 죄 빠져나간다 뼈 구멍 숭숭 뚫리도록 또 당신의 등골 뺀 밤 한사발의 곰국이 젖이 되고 꽃이 되.. 시조 2013.01.23
극야의 새벽 / 김재길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극야의 새벽 / 김재길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 시조 201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