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 이경희 (대상)
첫 페이지를 열면
당신의 중심이 일제히 긴장하는 게 보여요
단서들을 지우고 싶을 거예요
제 눈에 찔리는 것보다 무서운 가시란 없으니까요
문장은 자꾸 숨고 싶어요 그 때
짐짓 당신은 지워지는 척 흐릿하게 보일 거예요
힌트가 늘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지향으로만 찾아내야 하는 숙제같은 거예요
그 순간에 조금은 깜깜해 질 여름 폭우같은 거 부디 잘 견뎌 주세요
지나고 나서야 개요는 보이는 법이니까요
마지막 장을 남겨둔 채 천둥 속으로
당신을 덮으면서 나는 숨이 차 올라요 그럴 때 잠시 멀리 있을 게요
빗속에 서서 잠시만 당신의 활자를 더 맞을게요
거리란 적당한 시력을 위해 늘 필요한 일이니까요
각자의 행간에서 굳이 되돌아 오는 길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해답이 같이 있는 퀴즈는 조금 싱겁지 않을까요
그러니 각기 다른 열 개의 문장으로,
간절한 한 개의 이유를 풀고 싶을 때는,
한사코 끝까지 기대해 주세요, 당신과 나의 열렬한
오픈 북
미라 / 강정숙
발굴자들은 그녀가
임산부였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유난히 통통한 복부 때문이다
복부를 가르고
몇 겹 표피를 들추자
말라뭍은 탯줄과 자궁, 외벽엔
암반같이 굳어버린 핏물이 보인다
가느다란 손으로 배를 감싸고
긴 머리카락 뒤틀린 입술이
반쯤 벌어져 있는 그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를 낳을래요
머리카락으로 요람을 짜겠어요
사백년쯤 걸릴꺼예요
물기없는 여자의 내부가
형광등 아래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바늘 끝에서 피는 꽃/ 이사랑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어 살리고 아들 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 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 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 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 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난다
무화과 나무 / 강영숙
하늘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나무의 열매, 한 그루 세월을 붙들고 있다 내 안에서 자라난
그 나무 붉은 피 흐르지 않는다
손바닥 마구 흔들던 잎들 하늘을 뒤덮는다 아이와 나는 막든 바람 홀연히 빠져나가고 가지
마다 싱싱한 눈물 울멍울멍, 꽉 채운 동그라미를 무화과꽃이라 부른다
혈색이 창백한 혈액 종양내과 복도, 웃음잃은 사람들 차례대로 호명을 기다린다 오래전,
소아병동에서 노란 위액을 토해내던 차트번호 1137440 어린아이가 스물 다섯 청년이 되었
다 혈관 불뚝거리는 팔뚝엔 채혈 바늘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매연에 질식된 공기와 소통하는 국채보상공원 길을 걷는다 달구벌 대종이 소리를 가둔 채,
제야의 종소리를 준비하고 있다 잎들 뜯긴 나무들 서로를 세차게 껴안는다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는 희디흰 핏방울 뚝둑 떨구는 감옥, 무화과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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