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기린 / 김참

주선화 2020. 8. 24. 13:06
기린
ㅡ 김참


밀밭에서 놀던 기린이 우리 집으로 온다 마늘밭 지나고 도랑 건너 돌무더기와 대밭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긴 목 위에 있는 기린의 얼굴을 본다 참 슬픈 얼굴이다 보리밭에서 놀던 기린이 돌담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대문 앞 텃밭에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를 넝쿨째 뽑아 먹으며 기린이 온다 밭에서 잡초 뽑던 이모가 고개를 들어 슬픈 얼굴의 기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대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당근과 가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위로 새털구름 흘러간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기린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올라와 구름을 향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연기를 꿀꺽꿀꺽 삼킨다



거미와 나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래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 간다.

*제 15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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