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페이스메이커(외 2편) / 정상미

주선화 2023. 11. 11. 12:13

페이스메이커(외 2편)

 

-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춧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얼굴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 않고 앞을 밝히며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촉 밝은 전구

 

 

수직을 잃은 엄마 긁는 병이 생겼나

머릿속 알전구 희미하게 깜빡일 때

 

쟁여둔 설움은 터져

피가 나야 멈춘다

 

장갑을 끼워두면 물어뜯어 벗겨내고

무엇을 들려줘도 금세 던져버린다

 

온밤 내

튕겨난 잠에 말들이 날뛰는 방

 

궁리 끝에 지폐 모아 식판에 올려두면

고요해진 얼굴로 하나하나 집어 든다

 

사임당 이불 속으로

맨 먼저 모셔두고

 

대왕님 율곡 선생 퇴계 선생 줄 세운다

이불 아래 쌓아둔 단단한 지폐의 성벽

 

엄마를

지키고 있는

강력한 수문장이다

 

 

 

콘센트

 

 

오목한 몸에서

결핍의 냄새가 나요

바람은 서늘한 내 몸을 읽어내고

깊어진 구멍 속에서 살결을 갉아먹어요

 

젖은 몸으로 성급하게

다가오지 마세요

목마른 우리는 녹아내리고 말 거예요

천천히 들어오세요 놓지 않을 거예요

 

하루에 몇 번이나

우리가 될 수 있는지

파트너를 바꿔가며 타보는 구름 기차

이제는 빼도 좋아요 전기밥솥 플러그

 

 

 

* 정상미 시집 (안개의 공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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