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외 2편)
-정상미
맨 앞을 끌고 가는 바람막이 촛불 하나
어느 순간 꺼져야 할 비운의 단막에도
기꺼이 역을 맡는다 높바람 미당긴다
지친 몸 다 털어내 더는 춧불 아닐 때
웅그린 바깥을 밀어 저 멀리 앞세우는
한 번도 중심이 되어 살아본 적 없는 사내
한 얼굴이 바람을 연다 다른 얼굴 만나서
외로운 길 마다 않고 앞을 밝히며 나간다
심지가 다할 때까지 나를 당긴 아버지처럼
촉 밝은 전구
수직을 잃은 엄마 긁는 병이 생겼나
머릿속 알전구 희미하게 깜빡일 때
쟁여둔 설움은 터져
피가 나야 멈춘다
장갑을 끼워두면 물어뜯어 벗겨내고
무엇을 들려줘도 금세 던져버린다
온밤 내
튕겨난 잠에 말들이 날뛰는 방
궁리 끝에 지폐 모아 식판에 올려두면
고요해진 얼굴로 하나하나 집어 든다
사임당 이불 속으로
맨 먼저 모셔두고
대왕님 율곡 선생 퇴계 선생 줄 세운다
이불 아래 쌓아둔 단단한 지폐의 성벽
엄마를
지키고 있는
강력한 수문장이다
콘센트
오목한 몸에서
결핍의 냄새가 나요
바람은 서늘한 내 몸을 읽어내고
깊어진 구멍 속에서 살결을 갉아먹어요
젖은 몸으로 성급하게
다가오지 마세요
목마른 우리는 녹아내리고 말 거예요
천천히 들어오세요 놓지 않을 거예요
하루에 몇 번이나
우리가 될 수 있는지
파트너를 바꿔가며 타보는 구름 기차
이제는 빼도 좋아요 전기밥솥 플러그
* 정상미 시집 (안개의 공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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