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품

비를 들이다 / 주선화

주선화 2019. 12. 9. 11:27

비를 들이다

 

 

맨몸으로 비를 맞는다

 

비는 불어터져서 탱탱해지고

나무랄 데 없이 촉촉해진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갔다 건너오는 하루

 

비는 요일을 결정하고

요일의 기분을 선택한다

흐렸다가 맑아지는 건 순전히

비의 마음,

고집스럽게 일직선 아니면 사선으로

 

나의 하루는

부딪히고 깨지고 얼얼해지다가

검고 푸른 물병자리를 빠져나온

그림자에 점점 잠긴다



이상하고 경이로운 감옥처럼

 

 

하늘이 있고 흰 양떼구름이 있고

검은 산이 있고 검은 나무가 있고 검은 이파리가 있고

꽃잎이 있다

 

나무에게로 손을 넣는

하늘과 구름, 나뭇잎이 사라지고 꽃잎만 남는

 

떠오르다 도망가는 그가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슬픔 가득한, 그가 있었다

 

잃어버린 이름이, 잊어버린 풍경을 오래 배신하면서

어쩌다가 도착한 목소리처럼

 

이상하고 경이로운 감옥처럼

 

 

  * 마산 문학 43호 발표












 

 


 

 

 


'발표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수수 껍질 / 주선화  (0) 2020.12.15
받아둔 물 / 주선화  (0) 2020.11.12
폐차장/ 주선화  (0) 2019.12.09
안부 / 주선화  (0) 2019.09.05
시는 이렇게 오는가 / 주선화  (0) 201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