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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 / 김근

희끗, -김근 1 희끗, 당신이 사라진다 길 저편으로 희끗희끗이 희끗 하나만 남기고 희끗 하나만 가지고 남겨진 보이는 희끗에 나는 희끗, 집착하고 당신은 그만 안 보이고 나는 보이기만 희끗, 희끗, 보이다 말다하던 나는 말다는 아주 버려버리고 보이다만으로 내내 보이기만희끗, 2 희끗, 걸어서 올라갔지 그 비탈길 희끗, 희끗, 희끗, 모퉁이진 그비탈길 달빛 무성하고 길섶 너머 숲속 무성하고 깜깜하고 무성하고희끗, 깨지는 듯 물소리 희끗, 희끗, 끗, 끗, 또렷한데 어둠 저쪽에서부터 희끗, 팔랑거리는 나비인지 희끗, 희끗, 뒤집혀 희번덕거리는눈빛인지 희끗, 희끗, 희끗, 지금은 안 보이는 당신의 옷자락인지가, 희끗, 희, 희끗, 희끗, 오는데, 희끗, 걸어서, 희끗, 올라갔다는, 희끗, 말은, 생,..

꽃 진 자리 / 김은상

꽃 진 자리 -김은상  꽃이 마음인 줄 알았는데꽃 진 자리, 그 아득함이 마음이었다 외롭다는 말을 들었다그때는 그 말이 저기 저곳에서꽃이 지고 있다는 뜻인 줄 알지 못했다 내 안에 내가 흘러넘쳐어쩔 줄 몰라하던 이명, 겨울이 오고서야 알았다 외로운 사람과그리운 사람의 입술이서로의 손에 호, 호, 입김을 채워줄 수 있는 다정이성에꽃 찬란함이라는 것을꽃의 내륙에바람의 내력을 담고서야 알았다 외롭다는 말과그립다는 말의 때늦음이 겨우계절이라는 것을사랑 그후, 서성이며 일렁이며 불어오는매미의 빈 날개를 촛불 속에 적시며 알게 되었다

감포 어부 / 주선화

감포 어부 주선화 첫 새벽,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그 맛 당신은 겨자가 들어간 간장파나는 예나 지금이나 초고추장파 간장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나는 아니다당신과 나는 태생부터 다른 입맛 눈알이 빠질 정도로 심한 백일해 기침죽는다고 했다는데 나는 모르는 이야기 바람이 들었든가 흔들거렸든가 그냥 깃들었든가자라면서 칠판 글자가 잘 보이질 않아 눈이 나쁜 데는 가부리회*가 최고라고흔들어 깨우시던 감포 어부 아버지 회 맛은 세상에 없는 맛 초저녁에 조업 나가 새벽에 돌아와선 전속 요리사보다 빠르게갓 잡은 가부리회 한 접시 펼쳐놓고 나를 깨웠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사랑을 증명했지만살림살이는 허리띠를 졸라매도 제자리걸음 동트기 전 눈 비비며 먹던 꼬들꼬들한 그 맛 바다에는 어슴푸레하다 해가 떠오르고주위가 붉게 피어나는 ..

발표작품 2025.04.11

천원만 / 서연우

천원만 -서연우  가진 천원이 없어물메기탕 한 그릇을 나누려고 한다식당 주인이 손사래 친다저 사람은 어시장 사람들이 먹여 살린다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들 드시라 어시장 횟집 거리 화단에 앉은 천원만은모르는 사람에게아는 사람에게언제나 천원만 한다천원만의 희망은 막걸릿값이다 천원만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던형은 취한 상태로 귀가하다 계단에서 굴렀다영구차가 형이 근무하던 곳을 지나던 아침천원만은그 앞에 서 있었다추위를 아는지 모르는지할 말을 혼자서만 하는두 개의 눈이 두 곳을 보고 있었다 형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으면 했던 취한 천원만이취하지 않은 천원만을 마신다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면천원만막걸리값 장애인 수당이 형의 통장에 쌓이는 걸아는지 모르는지안주는 입을 닫고술잔을 계속 입을 벌린다 슬픔은 천원만과 ..

유령 연주가 / 김재근

유령 연주가 -김재근  자정이 지나고 숲이 흐느꼈다 노래하는검은 잎과죽은 새의 깃털꼬리 잘린 도마뱀과아카시아 새하얀 입술을 위해 내일이 영영 오지 않으니밤은 눈이 멀고눈먼 밤을 끌어안고 영생을 노래해야지 숲을 깨우는 바람의 손짓펄럭이는무덤을 열고검은 밤의 옷을 입고 묘지를 걸어야 해 피어나는 밤의 푸른 안개묘비에 내리는 달빛 얼룩누구의 마지막 호흡인지누구의 기침 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먼저 울어야 하나누가 먼저 떠나야 하나자신의 무덤에 누워자신의 눈알이 짓무르는 소리 듣는다 남은 자는 누구일까누가 알아볼까 귀뚜라미는 귀를 잃고 날개를 부빈다흩날리는 밤의 음표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누구도 두 번 죽을 수 없지누구도 두 번 울어야 하지만 산자처럼 두근대는 심장으로 밤은..

나를 멀리 던지기 / 서윤후

나를 멀리 던지기 -서윤후  나의 개 프랑코와 원반던지기를 한다선크림 백탄 도시의 원주민들은 약속이 많아 공원을 그냥 지나친다생략되는 풍경 속에 있다는 기쁨이 온다 너무 멀리 던졌는지 프랑코는 돌아오지 않고부메랑 하나가 날아와 내게로 꽂힌다삼십 년 전 어린 내가 유원지에서 던진 것이 저 멀리 프랑코가 주인을 만나 떠나간다 부메랑은 내게 말을 건다이제 제가 던질 차례예요 동해 맹방해수욕장에서허정 산부인과에서호주 원주민 아보리진이 점거한 언덕에서내가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나를 가장 많이 잃어버린 사람 부메랑이 꼭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전쟁 중의 길 찾기란서로의 참호 속에서 잘 깎인 과일을 먹고오리지널 시리즈를 보고사랑하고 씻은 듯이 헤어지는 일의 반환점 마지막에 프랑코를 부르지 않은 건세상에 나보다..

테러범 / 이예진

테러범 -이예진    캔 콜라를 흔들어봐  언제든 폭탄을 던질 수 있다   몸속에 설탕이 돈다 트럭이 눈길을 달린다 이중에면허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지  훔친 적도 없고  죽인 적도 없다   망가진 것은 많은데   구멍 난 몸에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 검은옷만 입는 네가 까만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여러 겁의 옷을 껴입었다  심장에 적어둔 말을 보여주기 싫어서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는데   몸에 난 구멍으로 찬바람이 들어온다  후진을 할 줄 몰라서  손으로 밀었다   몸에는 설탕이 얼마나 녹아 있을까  구멍을 막아도 춥다 나무 뒤에서 오줌을 눴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작은 벌레들이 모여든다  우리는 그만큼 작지 않아서  그림자를 만들 수 있지   밀면 밀리는 것 같아 뒤로 걸어가도..

이 시는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리호

이 시는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리호    부채표 후시딘을 목 주위에 발랐다 날도 더운데 까스 활명수를 바를 수는 없다 영하 1도에도 기운 펑펑   샘표 조림간장으로 두부조림을 만들었다 샘솟는 기운으로월요일   팽귄표 고등어조림은 우체통에 넣어두고 메모장을 남긴다  -내가 느린 게 아니야, 든든한 바다를 빠른 등기로 보내겠어   곰표 밀가루로 눈사람의 손에 장갑을 그리고  수요일은 심심해 곰 같은 애인이라도 불러야지   오뚜기표 튀김가루에 순후추를 뿌리고 핫도그를 만들 때일곱 번째 시험을 치르고 온 녀석의 입   백설표 올리고당을 넣어 맛탕을 할 때는 최대한 나폴거리는 앞치마 공주라고 한 번만 불러줘 전우!   해표 식용유를 물처럼 꿀꺽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청정원표 구운 소금을 뿌려 미..

소리, 수상한 것들 / 리호

소리, 수상한 것들 -리호  태극기 흔드는 소리 촛불 켜는 소리 버스 종점 눈 쌓이는 소리어젯밤 꿈이 수상하다 측백나무가 앓는 소리 윤달 먹은 가을이 숨는 소리 애동지가꾸물거리며 오는 소리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 예지몽이 잠꼬대하는 소리 보름 지나 하늘이 달 깎는 소리 잘못 걸려 온 전화에서 나오는 헛기침 소리가 수상하다 알람 소리 오십견 어깨 삐걱거리는 소리 마우스 놀라는 소리가위눌리는 소리 돋보기가 다가오는 소리 뒤쫓는 소리 하이힐 소리 철 대문 여는 소리 밥 짓는 소리 배고픈 국수 소리 열 맞춰 계단 오르는 달동네 소리 수십 번의 응찰 끝에 처음으로 성공한 낙찰자는 명도 된 달을 손에 꼭 쥐고 아홉수를 넘겼다 달이 우는 소리로 불로소득을 챙긴 시간 경매사가 수상하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를, 날개..

전면적으로 / 김미령

전면적으로 -김미령 어느 날 공사용 가림막이 전면에 펼쳐졌습니다말수가 줄었습니다당신의 아침 정원으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가는 내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꽃병을 마주 보고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근력을 키우기에 좋습니다과일 접시의 오와 열그 샛길은산책하기에 좋습니다 어느 날 포장지를 뜯어낸 새로운 애인이 우뚝 서 있고 새로운 기분에 적응하기까지미간이 무럭무럭 넓어집니다넓어진 이마로 지나치기 좋은 거리입니다 다른 종류의 웃음은 가끔 무섭습니다 가림막 한쪽 끝에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파스텔 톤의 저쪽 사람들이손짓합니다자고 나면 새로운 비밀이공터의 야채들처럼 쑥쑥 자라나고 이쪽과 저쪽의 경계엔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우리가 안고 쓰러졌던 그 자리 주위로쇼핑백을 들고 수없이 지나쳤습니다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