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89

엠페리파테오/ 김안

엠페리파테오 -김안  눈이 오면 땅은 몸에 박힌 발자국을 밀어낸다.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네가 있다. 잠깐 기우는 나뭇가지 따라너의 이름이 미끄러진다.별도 잠깐 낮아지고 눈의 단념에는 모서리가 없어서굶주린 고라니 허기를 달래고조심스레눈은 땅의 타락打樂을 덮어주는데 나는나무가 되지 못하고고라니기 되지 못하고별도 아니어서네가 있어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며 끝을 바라볼 뿐인데 그건 병든 몸을 바라보는 신비주의자의 믿음이라고저 빈 하늘저 차가운 하늘가득 새 한 마리제 그림자를 움켜쥐고 날아가자어둠이 눈발처럼 날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착하게만 살 뿐.쓸 뿐.살아내 써낼 뿐.

사월이 좋아 / 한재범

사월이 좋아 -한재범    사월이 좋아 사월은 거짓말로 시작되고 사월은 후드티를 겉옷으로 입을 수 있는 날씨 사월이라서 그런가 의자 가지고 이리  와 그런 소리가 들렸는데 의자만 놓여 있다   사월이라서 그래 사월의 나는 농담 같고 사월의 거리에는 사람 아닌 것이 많다 사월은 농담의 계절 농담은 웃지 못하는 사람을 만들고 내가 재미없어져도 사월이라서   그럴 수 있지 사월의 거리에 앉는다 머리까지 덮은 후드는 사월의 속옷이 되고 사월은 겉옷 하나론 부족한 날씨 나 하나로 부족해 내가앉은 의자는 사월의 빈 의자가 되고   나는 사월의 사과나무 한그루다 사월은 아직사과가 열리지 않는 계절 사월에 사과는 시작되지 않는다 사과의 계절은 언제일까 사과나무조차 사실 알 수 없는 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월이다 사과..

마른 멸치가 사나워질 때 / 정우영

마른 멸치가 사나워질 때 -정우영  멸치를 다듬어요.무언가의 주검이 아니라 식재료로.통째로 몸 내어주시니 그저 고맙지요.쌈싸레한 내장과 대가리는 사절입니다.미안하지만 내 기호가 아니에요.매콤달콤 볶음을 떠올리자 손놀림은 가볍고요.콧노래도 절로 흘러나옵니다.무아지경 멸치 똥 뽑아내는데, 이런 내 일상이 불통스럽다 느꼈을까요. 모자란 놈 하나 뉴스에 나와,평화 위해 전쟁 준비하자고 떠듭니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받아들이면서도, 전쟁이란 말에 들린 내 손은 마구 사나워집니다. 멸치 주둥이도 내 손을 물어뜯겠다는 듯 진저리 치고요, 뽑혀 나온 가시들은일전 불사의 전의로 팽팽합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의 참화로 눈앞은뿌예져가고, 찰진 욕설이 방언처럼 터져 나옵니다. 저 저, 메루치 똥통에 처넣어도 분이 안 풀릴..

미래의 손 / 차도하

미래의 손 -차도하  이 시에는 공원이 등장하지 않고, 시인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다.이 시에는 공터가 등장하고, 중학생이 등장하며, 등장할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한다. 중학생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원은 금연구역이기 때문에, 공터는 비어 있는 터이기 때문에 공터. 그렇다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는 아빠에게서 훔친 것. 아빠를 사랑할 수 없는 것. 가족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 친구도 애인도 사랑할 수 없는 것. 선생과 제자라면, 신과 신도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

순창시장 참기름 집 (시집 제목) / 오진엽

순창시장 참기름 집 (외 1편) -오진엽  시골이라고 국싼이 어디쎄고 넘친당가참으로 개꽝스럽네여기도 이제는 말여곡식이나 사람도국싼은 씨가 말랐당께쭝국산이면 어쩌고거시기면 어쩌간디북한산도 통일되면 국싼잉 겨쩌기 새댁들 보랑께여기 산골짝은 사람도 절반은물 건너온 외제랑께 땅에서 낫쓰면 다 똑가튼 겨   바지랑대   어깨를 짓누르는 빨랫줄뒤꿈치 땅에 박고 견디면서때로는 싸낙배기 바람에 다 내팽개치고털썩 주저앉고픈 마음왜 없었을까 장딴지 툭툭 볼가지게 버티다비틀비틀거려도절대 넘어질 수 없었던 견딤이이제야 끝났다 아버지가 쓰러졌다   * 오진엽 시집  ㅡ 삶창시선 83

모처럼의 통화는(외 두편) / 길상호

모처럼의 통화는 (외 두편) -길상호    거울을 보면 그 얼굴이 그대로 있어요, 할 수 없이 먹어 치워요, 혈당을 조절해야 한다는데, 과식하면 안 되는데,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 입에서 김이 날 일도 없고 발버둥도 사그라졌죠, 구름이 천장을 뛰어가네요, 까만 눈을 갖고있겠죠? 달이 헉헉 숨차고, 마우스는 바퀴를 굴리고, 컴퓨터가 한 장 한 장 백지를 넘기는 밤이에요, 당신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뒀어요, 삭은 밤이 고무줄처럼 끊어지기도해요, 술은 아직 마시고 있지 않아요, 미안해요, 어두운 이야기만 해서  노래는 저 혼자 두고    툭툭, 어깨를 쳐도 돌아보지 않았더니 삐친 노래가 혼자자리에서 일어섰다, 쉰 목소리로 불러도 알은체를 하지..

탕평 / 김륭

탕평 -김 륭  나는 이따금비행기 타고 개미 보러 갑니다. 집으로 가던 길 툭, 끊어먹고 내 심장에굴을 파고 들어앉아 상전이었던 그 개미 말입니다. 아직도 연인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가만히벌레 먹은 웃음이라도 꺼내얼굴을 돌보겠지요. 그러게요. 나는 그 웃음 좀 보러비행기를 탄 거고요.   *감상비행기와 개미 상상을 불가한다. 대비도 크다.탕평이란 싸움이나 시비,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고 나온다그대로다 비행기와 개미 어느쪽도 치우치지 않는다다만 존재할 뿐,상전은 과연 누구일까요?

너의 밤으로 갈까 / 김휼

너의 밤으로 갈까 -김휼  이 골목의 밤은 미완의 사랑 같다 어슬렁거리는 그리움과 내일을 맞대 보는 청춘들의 객기,접시만 한 꽃을 피워 들고 저녁을 달래는 담장, 그 아래코를 박은 강아지의 지린내까지 어둠에 물드는 것들을 간섭하느라거북목이 되는 중이지만 난 괜찮다 홀로 선 사람은 다정을 기둥으로 대신하는 법이라서담보 없는 빈 방과 함석집 고양이의 울음까지 시시콜콜알려 주는 이 골목의 살가움이 좋다 붙박이로 있다 보니 사고가 경직될까 봐나도 가끔 어둠에 잠겨 사유에 들곤 한다 진리는 항상 굽은 곳에 있다비탈을 살아내는 이 기울기는 너의 밤으로 가기 좋은 각도 퇴행을 앓는 발목에 녹물이 들겠지만굽어살피는 신의 자세를 유지한다 깊숙이 떠나간 너를 찾을 때까지

입술 / 김경후

입술 -김경후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네게 닿고 싶다고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내가 나의 입술만을 사랑하는 동안노을 끝자락강바닥에 끌리는 소리네가 아니라네게 가는 나의 말들만 사랑하는 동안 네게 닿지 못한 말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소리검은 수의 갈아입는노을의 검은 숨소리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옛날이야기 / 박소란

옛날이야기 -박소란  신발장에 쥐,쥐가 산다는 걸 알았다 밤낮 부스럭대는 엄마손에서 어제 일인분 김치찌게를 포장할 때도쥐는 살아서천장을 뛰어다녔다 비닐을 벗길 수 없다거기 잘 익은 생쥐 몇 마리 벌겋게 젖어 있을 것 같고그렇다면 낭패지나나 쥐나 구산동 반지하 살 때였나? 서랍장 뒤편에 새끼를 친 쥐몇날 며칠 찍찍대던식구였을지도 그 깜찍한쥐, 쥐들을 빗자루로 때려죽인 건 엄마였나? 엄마는 죽어서도 고단하겠다 쥐를 잡느라 엄마나 쥐나 배를 곯는지 허름한 식당 구석을 전전하며사는지, 어딘가 살고 있는지 아직보란 듯 나를 쫓고 신발장 앞으로 기어가 조용히 귀를 대면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저편의 쥐도 조용히 귀를 세우고 있겠지너도 참 너다 하면서 다 끝난 줄 알았는데엄마도 죽고 쥐도 죽고 아주 먼 옛날그들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