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88

그 길이 불편하다 / 조혜영

그 길이 불편하다 (1편) - 조혜영  나를 불안하게 하는 길이 있다는 걸깨닫기도 전에길은 저만치 멀어져간다 끝내 한 걸음도 딛지 못한 발바닥에달라붙는 진흙 덩이가내 한숨과 비겁의 흔적이라는 걸깨닫기도 전에길은 다시 저만치 멀어져 간다 한 걸음만 함께 걸어요그 보폭에 당신도 장단 맞춰주세요깃발을 따라오세요 길 위에서 이어지는 발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올 즈음하루의 긴 노동이 끝나고나른해지는 저녁이 불편하다집으로 향하는 퇴근길이 불편하다 그 길을 걸으며 손을 흔드는훤히 아는 사람들의 손짓이불편하다   신발을 찾습니다  난지도에서 잃어버린 신발을 찾습니다나는 아직도 맨발입니다쫓기다 벗겨진 나의 신발은 어디에 있나요끌려가다 잃어버린 운동화아직도 난지도에 있을까요신발을 찾고 싶습니다그날 이후 난 절름발이입니다 오른..

운지 (運指) / 하린

운지 (運指) - 하린  처음부터 당신은 미를 누르며 왔지요미는 발단을 막 지난 전개의 자리혀와 바람이 마침내 섞이길 원하는 자리 우리의 연애는 설렘을 막 벗어나려고 했지만손가락이 더 많이 필요한 사람처럼 서툴렀어요 위기는 파와 솔을 건너뛰는 것 난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하루는 파를다른 하루는 솔을 고집했지요 머뭇거리는 사이 눈이 내렸어요아득하게 다가오던 라의 기척들붙잡을 새도 없이 녹아 버렸어요 딱 거기까지만 도달해도 좋았을 텐데서로에게 가 닿지 못할 파동이한동안 혼자만 아는 허밍을 날렸어요 끊임없이 발병하는 시, 시, 시맹목적인 극단과 허무주의가 전염병처럼 번졌어요 수직의 감정을 품었어요모든 음악이 곤두박질쳤어요도가 치솟았어요 노래 속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스스로 자신을 조율하지 못한 채떠돌던 밤 마음의..

미투 / 조혜영

미투 - 조혜영  석바위 사거리 수(水)다방에서하룻밤만 자주면 문단에 데뷔시켜주겠다며성 상납을 요구하던 사람유명한 문예지에 작품을 실어주고등단시켜 시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돈 2백만 원을 요구한 유명했던 노동 시인 그 유명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여전히 그를 기억하고그의 문학을 연구하고그의 문학상을 만들어 후배를 양성하고양지바른 공원에 시비를 세워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된다꽃다발을 들고 시비 앞에 줄지어 서서활짝 웃는 많은 문인을 본다 그를 알았거나 알지 못했거나 가리지 않고그의 시비 앞에 모여 묵념하고시대의 진정한 노동자 시인을 칭하며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그의 시로 만든 노동가를 목청껏 부른다그의 시와 문학을 연구하는 새파란 젊은 대학원생도그의 시비 앞에 머리를 숙인다 나는 그의 시비 ..

일인 가구 / 김상혁

일인 가구 - 김상혁  아빠는 개자식엄마는 방관자문학에 그런 얘기 많았지오래되어 귀해진당산목처럼 흔했지말귀 아는 나무에 붙은매미는 입술 같아아빠는 개자식엄마는 방관자여름 내내 울렸지벌레에 약 치고제라늄이 녹는 계절뿌리가 움켰던 동전은다시 버려지고 녹슬고쓰다 만 노트 낡아가는데아빤 개자식엄만 방관자혼자 살다 간 귀신처럼짊어진 적 없는 짐을손저울에 올려본다나의 마음 더하기 나의 축대더하기 나의 정원과 울타리를응축한 나라는 육체 하나개자식 없는방관자 없는일인 가구 설문지를 채워가며문학에 그런 여름 많았지티셔츠가 온통 땀이었지설문 조사원 배웅하고가스 검침원 기다리는한때장마에 들뜬 벽보처럼마음은 깊고 흔했었지

페트리코 / 김성신

페트리코* - 김성신  잊지 마, 내가 두 명이길 바라는 거야빗방울은 누구나 초대하고 누구의 방문도 거절할 수 있어 이 집엔 누구도 사람이 아니어서 종종 계절의 냄새가 물씬거린다복도의 불빛, 옷장, 미니 냉장고, 커튼거기에 서성이는 어떤 것 사라지는 어떤 것으로부터 벽은 안전할까쫓기고 쫓는 복도의 발자국 소리수직이 횡으로 멈추는 얼굴로 허리띠를졸라매는 멱은다만 침묵할 의무가 있다 꿈과 생시 사이로 번지는 시선들뜬 목소리로 재를 터는 전등창을 열면 내게 눈을 떼지 못하는 다정은 충동적이다 입속 혀가 두텁게 희어지는 동안구석을 흔드는 웃음이깊이 박혀 숨이 되는달이 기울고 있다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너 닮은 한 줄을 마주쳐서비막을 펼쳐 활공하는 하늘다람쥐처럼동공에서 움푹해진 이름을 띄우는 듯통기성이 좋아진 실..

거울의 자매들 / 김재근

거울의 자매들 - 김재근  이렇게 그릴 데가 많았나이렇게 고칠 때가 많았나 어쩌다 마귀할멈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데 거울아 거울아들여다볼수록 얼굴은 딱딱해진다 어디까지 참아야 하나?어디까지 만져야 하나? 시간을 놓친 얼굴은 먼 얼굴 같아길 잃은 낙타 같아누구도 도울 수 없는데얼굴을 낳을수록 묵음이 되어가는 자매 더 그릴 데도더 고칠 여백도 없어번갈아가며서로를 들여다보는데자신의 얼굴을 수소문하는데 이렇게 참을성 없는 얼굴은 처음이야이렇게 고치고 지우는 얼굴은 우리뿐일걸 들여다볼수록 위장술은 늘어난다 거울아 거울아오늘은 어떤 얼굴을 낳아줄래더 도울 얼굴이 없어 거울도 힘이 드는데자매는 포기할 수 없다 호호호입김 불며속눈썹을 붙이는 자매이게 최선일까이렇게 정직한 얼굴은 우리뿐인가 매일매일 자매는 태어나고매일매..

장미의 방 / 김재근

장미의 방 -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메아리가 닿기에여긴 너무 멀어 몸은 어두워진다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목소리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몸은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몸 바깥에서 몸 안을 들여다보는자신의 눈동자아직 마주친 적 없어침묵은 떠나지 않는다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아말없이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빙하에 스미는 숨소리 같아잠 속을 떠도는 몽유 같아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불 지르기 전에 / 김복희

불 지르기 전에 -김복희  안녕 내가 집을 불태우려고 해그런데 우리 집을 불태우면옆집이 불탄다고 해그런데 옆집이 불타면그 옆집도 불탄다고 해 실로검은그림을 위한 밑 색을 칠하려고 해그러러면 잘 가석양잘 가지난 밤 정전잘 가어린애의 불잘 가여자의 피잘 가피에 젖은 물잘 가 잘 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까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잘 가 살점을 베려면 피를 흘려야 하듯이나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거야 날아오르는 작은 새들과 잔가지와 전선과 높은 건물의 끄트머리와내가세상을 잠깐 어둡게 할 수 있다는 것반가워작은 새반가워 잔가지반가워 전선반가워 반가워아주 좁은 악마의 유리병 속으로들어가듯이 안녕환영해 이런 건 삶이 아니라고불 지르기 전에

능소화 핀 언덕 마을 / 황형철

능소화 핀 언덕 마을 -황형철  꽃이 귀한 계절에 피었지만마냥 웃을 수 없어 장마도 태풍도 견디고 뙤약볕쯤 아랑곳없이높은 담을 타고 피랑도 건너고야 마는집념을 알겠니 그때 온몸에 찌릿한 근육통 말이야 한여름 뜨겁게 살다 가면 그만인 듯창창한 꽃봉오리를과감히 떨구는 결심은 무섭고 이 순간에도누군가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고비를 넘고깜깜 절벽에 몸을 던지기도 하는아찔한 생각 빨갛게 번져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게임도 아닌데집이 집을 받치며층층이 올라가는 이야기는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넝쿨다름 아니겠니 우리는,

종이의 안쪽을 걸어요 / 정상미

종이의 안쪽을 걸어요 -정상미    소설을 읽는 밤  잠깐 달래고 가는 게 어때요?   종이의 감정을 따라가면 그들의 처음이 궁금해져요종이가 활자를 입고 더러 그림을 걸치고 윙크를 날리면 먼 곳의 나무 향이 걸어나와요 종이나라로 가는 길은 보루네오 열대우림행 티켓이 필요해요   입국장에 들어서면 나이테 세관원이 동그란 미소로맞아줍니다 그녀의 얼굴엔 늘 물기가 묻어 있어요 꼼꼼하게 짐을 검사하는 이는 커다란 나무에 말 가웃 거름을 보태던 코끼리 총각이죠 그는 커다란 코로 짐들을 뒤적뒤적 간간이 코웃음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아요 친절한 원숭이 기사는 택시를 몰며 저 나무가 자기 집이라 자랑하죠   우림으로 가는 길은 몰이해로 질척거리죠 햇빛의 옹이가 간신히 우림의 정문을 찾아가요 그때 비단구렁이가 꽈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