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읽어 보는 시 788

질병통역사 / 강신애

질병통역사 *  -강신애  모르겠어요처음 본 내게 당신 치부를 고백하다니 백미러로 핑크색 손톱과구릿빛 피부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죄훼손된 꿈,봇물 터지듯 펼쳐놓다니요 그건 발아래히비스커스 꽃을 바치며태양신 사원에서 고백해야 했어요 오늘은 관광 가이드내일은 의사에게낯선 지방, 병중의 신음을 번역하지만 우리는 모두 오지여서각자의 방언을 말할 뿐 나의 말들이 주구呪具 같은 상징으로다정한 운율로당신 마음을 어루만졌나요 내 이마에 바른 연꽃 향유가당신 가슴골의 딸기 아플리케가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대체 누가 우리 허기를 통역해주죠? 당신의 아픔, 나의 슬픔똑같은 환처인데 산비탈로 꼬리를 흔들며회색 원숭이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 줌파 라히리,

돌 앞으로 / 정영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한쪽에 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부르기 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기다리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않았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하나의 장소가 필요해서 나는 돌 앞..

주상절리에 앉은 새떼들 / 이순옥

주상절리에 앉은 새떼들 -이순옥  새들에게 절벽은 피난처이다멀리 바라보는 습성의 새들은날개를 펴지 않고도 멀리 볼 수 있다 모두 잊었다잡초 무성하던 밭고랑도 쑥굴헝도주상절리 위에서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늠하지 않는다바다는 그저 넓고 아득한 그리움일 뿐 절벽을 기어오르며 살다가 바람처럼 스러지는 것이 생이라는데주상절리 깎아지른 절벽에는 지금도 수많은 바닷새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고 먼 대양으로부터 달려온 파도가 잠시 머물다스러진다 가파른 하루하루 오르내리며 사는 목숨들이 모여들어숨 돌리고 있다 올려다보는 생은 언제나 절벽이다 내려다보는생은 낭떠러지다 눈부신 생이란 반짝반짝 수평선 위에 떠가는한닢 조각배일 뿐 주상절리 위에서는 바람의 비명이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절벽도 익숙한 일이라 물거품도 익숙한..

사기 라이브 / 이가을

사기 라이브 -이가을  살면서 거짓말이 가장 쉬웠어요말의 기술자 아버지에게가면을 쓴 거짓말, 힘의 권력을 배웠어요타고난 사기술의 아버지자식으로 태어난 것부터가 사기였다고껄껄, 거짓말은 친절한 가면을 써요탐욕의 배경 사기라이브가 무죄라던아버지의 항변에 동의할 뻔했죠어버지의 사기썰은 진실이니까 레전드니까속은 게 바보라고 말하지 않겠어요죽음으로 눈물로 쓴 유서를 보았어요모든 사기는 가스라이팅친절로 포장한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총알보다 더 빠르게 마음을 관통할 테니화려한 언변으로 당신의 마음을 빼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오래 몸에 학습되었죠사기의 명가 아버지 말은 진실된 가훈이죠인생의 잠언이죠 다른 잠언을 들은 적이 없어요일일드라마 같은 사기 역사를 써 온 날들인생을 도둑 맞았어요썰의 레전드 나의 아버지 보..

오로라 콜 / 숙희

오로라 콜 -숙희                   우리 호텔의 투숙객 여러분께.오늘밤 오로라가 나타나면 깨워드릴게요.                                               - 당신의 Q. 무엇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선잠에 들었다 깰 때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때밤이 긴 곳에서 불면이 이어질 때실패하기 위한 실패도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이불 위에서 변기 위에서 초조할 때 핀란드나 아이슬란드나먼 극지의 호텔에서 한밤중 손님을 깨워준다는오로라 콜을내 방에서 기다리지 정말 그러면나도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고빛의 휘장을 따라달리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느새 새벽 거리의 청소노동자와음주운전자가 같이 깨어 있는 시간 그 뒤에서홀로 눈물 흘리게 될지도 모르지누군가 죽..

오징어입 버터구이 / 고명재

오징어입 버터구이 -고명재  어떤 종류의 입맞춤이 탄생합니까키스는 어디까지 가능합니까강아지의 주둥이에 입을 맞출 때확 벌어진 목련의 중심에 코를 박을 때뽀뽀입니까 키스입니까 꿀벌입니까오늘은 꽃다발을 들고 너에게 달려가는 날 졸업할 때 왜 꽃다발을 주는지 아세요?우선 꽃집에서 풍성한 다발을 삽시다까치발을 들고 한번 걸어보셔요아무리 살살 걸어도 폭발입니다꽃들끼리 정신없이 키스합니다 다발은 그런 것 터널 끝의 공동체처럼키스를 퍼붓다 통하는 뚫어뻥 부황 같은 것학사모를 하늘로 던지고 강아지를 껴안고강아지를 하늘로 던지고 꽃다발을 껴안고힘껏 뛰면 머리칼이 펼쳐집니다우리는 사실 존재의 폭죽입니다 지금 막 맥주잔을 들이켜는데잠깐 붙었다 떨어지는 입술도 키스키스도 키스 진로眞露도 키스 머릿속에서드넓게 펼쳐져 스치는 금..

부재 / 김휼

부재 -김휼  긴 목으로 빈 병이 서 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참이슬 빈병에 간장을 붓는다개별로 찬란했던 이슬이 검은 어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동안 상반된 조합이 얼마간 충돌을 일으켰다 미역국을 끓이며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다맑고 투명한 이슬이 검은 어둠이 되는 속도라든지 누군가의 생에서어둠은 빛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괴로워했다 빛을 담아 우릴수록 검어지던 간장독을오래도록 빛을 품고 깊어지는 사이극단적인 맛을 즐기던 이들의 혀도 순해져 갔겠지시나브로란 이럴 때 필요한 말 조금 전까지 빈 병이었던 참이슬 뚜껑을 연다간장 한 숟갈이 더해지니 감칠맛 나는 미역국 곰삭은 어둠의 맛에 울컥해지는 오늘나는 빈 병의 긴 목이 된다

송호리 / 박길숙

송호리  -박길숙  여름이 끝났어 이제 돌아가야 해 파라솔을 접으며 너는 말한다 마른 모래는 멀리 젖은 모래는 발아래 떨어진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관광객이 바다와 해송과 아이를 찍는다 언제 또 부풀어오를지 모를 주황 튜브와 함께 사각 프레임 안으로 나무와 하늘과 백사장이 잘린다 각자 여름으로 들어간다 옆집 고양이가 죽었대 그런데 슬프지 않아 나는 고양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바다와 백사장을 나는 호치키츠처럼 붙잡고 있다 가만있어 움직이지 말고 마음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걸까 포기가 필요한 걸까 어름이 가면 잘린 바다와 모래 사이가 벌어질 것이다 송호리에서 알궁둥이를 까고 똥을 누던 친구 얘기를 하며 너는 웃는다 나는 하늘과 바다 사이 철심의 마음으로 이 계절을 붙잡고 있을 나무를 생각한다..

혀로 염하다 / 길상호

혀로 염하다 -길상호  트럭에 치인 새끼 목덜미를 물고 와모래 구덩이에 눕혀놓고서 어미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건 오래 핥아대는 일 빛바랜 혀를 꺼내서털에 배어든 핏물을 닦아댈 때 노을은 죽은 피처럼 굳어가고 있었네 핥으면서 꺼진 숨을 맛보았을 혀,닦으면서 붉은 눈물을 삼켰을 혀, 어미는 새끼를 묻어놓고 어디에다 또야옹, 옹관묘 같은 울음을 내려놓을까 은행나무가 수의로 바닥을 곱게 덮어놓았네

엠페리파테오/ 김안

엠페리파테오 -김안  눈이 오면 땅은 몸에 박힌 발자국을 밀어낸다.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네가 있다. 잠깐 기우는 나뭇가지 따라너의 이름이 미끄러진다.별도 잠깐 낮아지고 눈의 단념에는 모서리가 없어서굶주린 고라니 허기를 달래고조심스레눈은 땅의 타락打樂을 덮어주는데 나는나무가 되지 못하고고라니기 되지 못하고별도 아니어서네가 있어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며 끝을 바라볼 뿐인데 그건 병든 몸을 바라보는 신비주의자의 믿음이라고저 빈 하늘저 차가운 하늘가득 새 한 마리제 그림자를 움켜쥐고 날아가자어둠이 눈발처럼 날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착하게만 살 뿐.쓸 뿐.살아내 써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