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20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그런 날이면 언제나이상하기도 하지, 나는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공..

홍화 / 고성만

홍화 -고성만  넘실넘실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붉은 물감 엎질러놓은 듯 나 어릴 적 보리 베는데 도망가지 못하는 카투리와알을 팔아 운동화 사려던 어머니 장에 가셨다가결국 못 팔고 눈물 뚝뚝 떨어트리며 돌아오셨다는이야기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바다가 파란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것은 머리가 어지럽게 때문이다 낡은 필통 속 몽당연필들 동전 몇 개 짤랑이면서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밭에서 날린 불티 온 마을을 활활 태우는데 잇꽃 필 무렵 피가 부족해 용지붕 위로 끊임없이 구름이 흘러간다 헬기착륙장 너머 새 세상이 열린다는데 먼바다로통통통통 떠가는 배 구름은 먹장구름은 장맛비를부른다

메밀꽃밭 / 박성우

메밀꽃밭 -박성우  씨앗을 넣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메밀 줄기가 오밀조밀, 꽃을 피운다 한낮 볕에 이파리를 늘어트리면서도가늘고 여린 손을 뻗어 꽃을 내민다 해가 어지간히 넘어간 늦은 오후,호스를 밭머리로 길게 당겨소나무 산자락 메밀밭에 물을 준다 여느 때처럼 별생각 없이 물을 틀고밭이랑 가운데로 물을 뿌리는 찰나, 배추흰나비 떼가 일제히 솟구쳐 오른다실로폰 소리처럼 경쾌하게 튕겨 올라메밀꽃밭을 배추흰나비 밭으로 바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일순간에내 안쪽으로도 하얗게 치고 들어와나조차도 메밀꽃밭 위로 띄워 올린다 하얗게 일렁이는 마음은 멈추지 않고물 호스를 그냥 거두어야 할지주던 물을 마저 주어야 할지,궁리하던 사이에도 배추흰나비 떼는 팔랑팔랑 붕붕, 나를 잡고 솟구쳐 오른다

밤바치* / 길상호

밤바치* -길상호  겹겹 안개에게 기도하는 동네가 있다네 돌을 넘겨 가재를 읽고 바닥을 읽고물을 다 읽고 나면 여길 떠나야지 고립을 기르다가 고립이 제 덩치보다 커지면 훌쩍 산길이 혼자 뜀박질도 하는 동네가 있다네 목이 쉬어 저녁은 오고밤하늘 갈아 씨 뿌리는 하나님이 있다네 다래 순으로 음악을 짓던 곳기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여 회의를 하는 곳 안건은 풀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문 닫은 분교 운동장만 철봉을 하네 비가 이장을 맡은 동네 있다네이곳저곳 비느라 사람들 등은 굽고 하나님도 주름을 보이며 눈부시게 웃는주소도 아득한 동네 한번 들어간 시내버스는 보이질 않네  *강원도 홍천군 내면 살둔마을에 위치함

우수 무렵 (외 1편) / 성명진

우수 무렵 (외 1편) - 성명진  집 앞에 아이가 나와 서 있고노인이 앉아 있다한순간 아이와 노인이 가만히고개를 들었다 사내 하나가 고개를 떨군 채앞으로 다가선 것한 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그는 노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허물어져내내 들썩이는 몸 추운 행색이었으나다행히 지는 죄는 없어서인지지나는 햇빛에 비치는 몸이몰래 환했다   작약  우리 집에는꽃에서 나온 여자가 살고 있다 서러운 남자를 만나새끼들을 낳아 밥해 먹이고옷을 수선하면서 늙어 있다 이따금 목을 기울여 발갛게 울고이따금 목을 살랑여 발갛게 웃는다 손 동그랗게 모으고 서거나물 빠짐이 안 좋은 날 짓는 쓴 표정은꽃 속에 살 때 익힌 일 이제쯤 꽃으로 돌아가 예뻐져야 하는데새끼들 약 지으러 문밖 나간 사이그만 져 버리는 꽃 영영 꽃 속으로 못 돌..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 이승희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작약 속을 걸었다작약이 없다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거기와 이곳의 차이는 없고환상이라고 말하면 이미 환상은 아닌데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은거짓말이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새 한 마리가 바라본다나도 그곳을 바라본다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은 거기 있다허공에 뿌리를 두고꽃을 물속에 두었다누가 밀어넣었을까누가 밀어올렸을까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내 얼굴을 스쳐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작약이 없다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이제믿지 않는다치욕스럽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봄의 제전(祭典) / 송찬호

봄의 제전(祭典) - 송찬호  마침내 겨울은 힘을 잃었다여자는 겨울의 머리에서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을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길고 지리한 겨울과의 싸움은 지나갔다북벽으로 이어진 낭하를 지나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진 차가운 방에얼음 침대에겨울은 유폐되었다여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왕관은 숲속에 버려졌다겨울은 벌써 잊혔다오직 신생만을 얻기 바랐던재투성이 여자는봄이 오는 숲과 들판을 지나다시 아궁이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부엌과 정원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꽃이 피는 나타샤 / 정윤천

꽃이 피는 나타샤 -정윤천  꽃들은 모두 나타샤에게서 태어나지 나타샤는 지명이 아닐 수도 있어 총을 든 군인의 이름이거나수도원의 뽀족한 종탑 아래일 수도 있지 분명한 것은 나타샤가 나타난다는 데에 있어그도 어차피 1월에서 12월 사이에 태어났을 거니까 해바라기처럼 길쭉한 걸음일 때도 있지나타샤의 말투를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말 보다는 나타나기를 즐기는 나타샤 무거운 짐을 태운 트럭이 지나갈 때공장에서 나온 남자들이 술집 안의 난로를 향해함부로 이거나 세차게 쳐들어갈 때에도 나타샤는 조금씩 길어나지그것은 나타샤 만의 좋은 버릇 중의 하나 입술에 연필을 문 정원사 아저씨가나뭇가지에 빨간 새집을 매다는 커다란 집의 담장 안에서 지금까지 보다는 아름다워지게 될 거야꽃이 피는 나타샤가 여기를 지니고..

해먹을,(외 1편) / 최형만

해먹을, - 최형만  공중에 걸고 누우면 별빛을 털어낸 별찌 하나가길을 떠났다 그때마다 까만 하늘에 박힌 것들이떼를 지어 울던 밤을 안다 바지랑대에 그물을 걸면 오래전 다녀간 바람도그늘에 드는 걸까 아버지는 촘촘한 그물코 사이로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구멍이 커질 만하면 꽁무니부터 꿰매는 엄마, 따뜻한 그물 하나 짜고 싶다면서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하늘 달팽이가 몸을 뒤집는 동안, 문지방을 넘어간 나는 샛별을 켜고 아이들은 먼 별자리를 배우고, 떠도는 바람을 한 삽이나 퍼먹은 날에는 허공에빗금을 긋고 방향을 트는 게 일이었다 햇볕에 물둘레 치는 날이면 풀어진 실밥을 통째로  기워가던 폐가의 봄, 자글자글 끓어대는 투가리처럼 해먹의 일생도뜨거웠을까 자목련이 질 때마다 누가 당기는 것같다   개펄의 연대기 - 최..

한 손 / 김안녕

한 손 - 김안녕  시루에서 콩나물을 뽑아내고 번쩍번쩍 빛나는갈치의 목을 탄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두꺼비 손 뚝딱뚝딱밥이 나오고 공책이 나오고 표준전과가 나오고 마음먹고 산 옷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을 때 사람의 입술이 성벽처럼 완고할 때 돌을 던지고모래를 흩뿌려댔다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내 손을 더럽히는 것이었다니 손을 잡고 싶었지만 망설였고 손을 내어줄 수있었지만 주머니에 넣어 두는 편이 안전하다믿었던 날 손쓸 수 없는 일도 세계엔 넘쳐났지 보증금 천에 월 삼십, 손 없는 날을 골라 이사했지만 부자가 되거나 갑자기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은 되었다 더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침대맡에 호랑이 그림을 올려 두고는 손이 하나뿐인 어떤 여인을 손가락이 열한개인 또 한여인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