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19

고마워의 진화 (외 1편) / 김미경

고마워의 진화 (외 1편) - 김미경    추측건데 92년생 다섯 살 짱구를 따라 하던96년생 아이가 "엄마는 왜 고마워를 안 해? 내가심부름을 해주면 고마워해야지." 그때부터고마워는 내 등 뒤에서 언제나 나올 준비를 하고있었지. 그림책을 읽어도 고마워, 세수해도고마워, 양말을 신어도 고마워, 우유를 마셔도 고마워, 수없이 고마워, 고마워 씨를 뿌리면고마움이 잭의 콩나물처럼 자라 구름을 뚫고홀씨를 날릴 거야. 고마워, 고마워하면서앙코르와트로 갈 것이고 데칸고원을 지나 홍해를갔다가 탄자니아를 지나 삼바 퍼레이드 사이에머무르다 나이아가라 폭포에도 갈 것이고 제우스신전을 돌아 성가족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수많은 나무와 꽃으로 빛날 거야. 조금 학습처럼들리겠지만 고마워는 화성을 탐사하던 와트니가키운 식물이야. 우주..

틈 / 이삼현

틈 - 이삼현  어금니 하나가 시큰거려 치과에 갔더니금이 갔단다신경치료 후 크라운 시술을 받았는데 금속을 씌운 이빨이 한동안 어색하기만 했다넌, 누구냐며말 많은 혀가 자꾸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다른 이빨들도 짝이 맞지 않다고 딱딱거렸다어느 날 갑자기생뚱맞은 녀석이 찾아와 들이박혔으니한동안 웅성거릴 수 밖에 키가 약간 큰 것도 같고계절에 맞지 않게 두툼한 옷을 껴입은 것만 같아제대로 버틸 수 있으려나 걱정 반 근심 반으로 한 며칠 지켜보는데 기특한 것이앞니 송곳니 어금니 할 것 없이단단히 박혀 도저히 옮겨 갈 수 없을 것 같은 이빨들이조금씩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이다쓴맛 단맛 가리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며슬금슬금 옆 걸음질 치자 맘 편히 한 식구가 되었다 틈을 벌려 내준 자리에뿌리를 뻗고사철 푸르른 기암..

누가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외 2편) / 정영주

누가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외 2편) - 정영주  허옇게 뒤집어쓴 눈으로강가에 홀로 앉아있는 나무 의자누가 쓸쓸한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차고 냉랭한 의자도 한 번쯤은누군가의 안식이었을 터,마치 혹한을 견디는 것이 사유라고 말하는 것처럼아직은 성성한 네 다리가 의연하다 의자의 전언이 강을 건너 네게로 온다몇 번이고 나는 그 의자에게로 걸어가고 싶었다식은 햇빛 한 장 걸친 의자의 눈을 털고오랫동안 시 한 수 적지 못한 냉기의 몸을부려놓고 싶었다핸드폰을 열고 먼저 그를 담는다고독한 사유 한 컷!제 몸에 눈을 받아 앉혀놓고 강물을 베끼는의자의 시위 곁으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린다   겨울 배롱나무  제 살가죽을 제가 벗긴다몸을 비틀고 용을 쓸 때마다잎 하나 남지 않는 벌건 선혈의 몸피제 맨살 어깨에 ..

고즈넉함과 하룻밤 (외 1편) / 신달자

고즈넉함과 하룻밤 (외 1편) - 신달자  창너머 반달이 반짝 날 부르는가분명 날 보고 한마디 던졌는데내가 앉은 방은 작은 소음까지 심하게 쓰다듬어서일까고요를 너무 만지작거려딱 한마디 표현으로 멍한 고즈넉함이다 이걸 천복으로 알아야 하나?나 오늘은 술병보다 고즈넉함이다 손이 깊숙이 쑤우욱 들어 가는 포근함 내 몸의 장기들도 녹아 사라진 듯 자위하듯 고요를 너무 만져 푹신푹신한 고요의 결이 다 닳아 미끄러운 듯 오늘도뼈와 살이 다 흐르고 흘러 고요의 끝에 가 닿게나 너와 잘래..   늙은 밭  늙은 밭에도 잡풀은 자란다절반은 자갈이 들어박혀 수명 다해가는 거친 밭에도돌 사이를 비집고 잡풀이 자란다 이렇게 천둥이 치고 치는 밤늙은 여자의 밭에도 이름도 없는 바다의 해일이 쳐 들어 와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잡풀이..

허공에 매달린 무덤들(외 1편) / 이대흠

허공에 매달린 무덤들 (외 1편) - 이대흠 구름을 읽는다이국 문자로 적힌 오래된 책구름 문자를 읽으려다 보면 문맹이 된다 활자공장에서 활자들이 쏟아지듯구름 활자들이 쌓였다가 흩어진다 별이 죽고 다시 구름이 만들어지고 멀리서 태어나는 것들은 잡을 수 없다 상수리나무 숲으로 그가 들어간 뒤부터숲보다 멀리 바라볼 때가 많다 내가 아는 문자로 구름을 읽으려 했다 그건내가 그를 이해했던 방식 노고지리 울고 매미가 울고 쓰르라미 울고울고 울고 울고 생각을 구긴다 뭉친 휴지가 축축하다고깃고깃 손에 잡힌 건 눈물만이 아니다 왜 우는 것들은 온몸을 걸레처럼 짜면서 소리를 내는 것 같지? 꽃핀 줄도 몰랐는데상수리나무에는 어느새 열매가 맺혀 있다 어떤 열매는 보이지 않는 너머로 갔을 것이다 너머에 구름이 있고별이 있고  ..

분꽃 / 나석중

분꽃 - 나석중  분꽃은 수더분하게 피어서가서 살고 싶은 동화의 나라가 들어 있다 지구는 태양을 돌고 돌아도내 소꼽놀이 내 각시떠오르는 분이의 얼굴은 마냥 일곱 살 분칠을 안 해도 예쁘기만 했던 맨얼굴에그 애뜻한 열매 서넛흰 속살 으깨 요리조리 바르며 낄낄걸리던 분이가 대문 밖에 마중 나와서생애에 가장 선한 나라로 데려가고 있다

여름 / 박남희

여름 - 박남희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린다문을 열었더니 빼꼼히 구름이 비집고 들어온다구름은 들어오다가 열린 문 사이에 걸쳐 있다(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머리를 민 낯선 아내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 광경을 보며'여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그 광경은 오래 전부터 액자 속에 갇혀있다 누군가 칸트와 데리다에게액자 속 그림을 보고 질문을 던졌더니칸트는 액자 속 그림인 에르곤을 예술이라고 하고데리다는 액자인 파레르곤까지가 예술이라고 불렀다 나에게 아내는 에르곤일까 파레르곤일까젊은 시절의 아내는 아름다운 에르곤으로 보였는데나이가 들면서 점점 파르레곤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 역시 아내에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아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수시로 미끄러지면서 다가와서나에겐 여전히 차연(差延)*이다 아내의 모습에는 확정..

웃음과 울음 사이에 파가 있다 / 김솜

웃음과 울음 사이에 파가 있다 - 김솜  파가 판친다바람이 바람을 파는2024년 봄은 느닷없다. 꽃보다 공空을 먼저 품는 파 숫자 875를 매단 순간엑스트라가 벼락같이 주인공이 된다 매대에 길게 누워 처져 있던 파가몸을 일으켜 춤을 춘다눈과 귀와 입을 가진 신을 신은 파가대행진에 가담하고 거리 유세를 한다 일파만파 파장이 크고 파열음이 깊게 퍼진다눈과 귀와 입을 가진 신을 신은 파가이상할리 없다언제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던가 어떤 손에 잡힌 순간 파는 상징이 된다 잔 술과 까치 담배를 팔던 때처럼한 단이 한 뿌리 두 뿌리로 분리된다감정 없는 파가 감정을 조장한다더 이상 이상할 리 없는 파가 파다하다 파안대소하는 파 오래 버티면 뜨는 날 반드시 온다는 거파는 이제 안다 부엌의 입장을 살펴야 하는 나는 ..

드라이브 / 박소란

드라이브 -박소란    차가 달리는 동안  나는 조수석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는다  차 안은 참 안락하구나, 밖은 어둡고마침 비까지 내리고 있기 때문에  차 안은 더욱 안락하다  아주 딴 세상 같다는 말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인적 없는 어디로도  갈 수 있다고 마음만 굳히면 언제라도  바퀴를 굴리기만 하면 문제없다, 아무문제 없다고  누군가 가리킨 곳에는 a코스 b코스 c코스 d코스가 있었는데  나는 어쩐지 자신이 없고  유턴을 하면 터널이 나오고 터널이,터널이, 터널이 계속  차에 치여, 차에 깔려, 같은 광경이 스치곤 했는데  마지막은 결국 차에서, 같은 은밀한이야기도  큰일은 큰일이지  그럴 때는 일단 술에 취하는 것이 좋아문틈은 테이프로 꼼꼼히 막는 것이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구..

이용악 문학상 수상작 / 성선경

후투티에 대하여 - 성선경  사슴의 뿔처럼 훌륭하진 못해도나름 아름다운 머리 깃을 가졌다 해도내가 책임져야 할 것에 대하여날갯깃처럼 자유롭진 못하다후투티라는 이름이어느 열대지역의 섬 이름처럼이국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나는 당신의 생각처럼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다날아다닌다고 다 자유로운 건 아니고지붕 아래 깃들었다고 다 암울한 건 아니듯후투티 후투티 이름을 부르면어디서 옷차림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이국적인 모습으로 환하게 다가올 것 같지만이름만으로 자유를 구하고이름만으로 영혼을 살찌우진 못한다사슴의 뿔처럼 훌륭하진 못해도나름 아름다운 꽁지깃을 가졌다 해도나는 당신의 생각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후투티 후투티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만으로도 이국적인환한 얼굴로 다가올 것 같지만꽁지깃만으로 우리 생을 살찌우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