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20

지랄 지랄 / 주선화

지랄 지랄 - 주선화  어두운 거리를 헤매다 잠시돌아온 맑은 정신을 붙들고 있다 엄마 엄마 내가 누군지 아나?봄빛에 노란 한 떨기 꽃같이 누워서는ㅡ 지랄하네 말 같지도 않은 말 하지 말라는 듯 같잖다는 표정으로닫힌 꽃봉오리 살짝 입을 벌리듯 엄마 엄마 엄마!막내딸이 또 소리쳐 부른다 내가 누군지 아나?ㅡ 지랄 지랄 용천 떠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지랄 버릇하는 줄 알까? 생채기투성이 산수유꽃은 어제와 다른 날씨에지랄발광하며 용천 떨듯 피고 지는데 지랄도 풍년인데층층나무 목 산수유에게 이제 저 소리 들릴까? 노랑노랑 게워 내듯 우렁우렁 피는 꽃지랄하며 피는 꽃 참 곱다  ㅡ 주선화 시집 ㅡ 현대시 기획선 105

서시 / 한강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내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이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

엘리베이터 / 김솜

엘리베이터 (외 2편) - 김솜  이게 납니다나 라구요?날아요 나는 아주 자유합니다만자유롭지 못한 비행입니다규정 속도를 인내합니다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길을 벗어날 길 없습니다 사각형 몇 개를 날개라 말하지 마세요한 자리에 박혀 승강의 어두운 길만 위아래로 납니다 난다구요?이게 납니까?나 아닌 사람을 날게 해줍니까? 내게 말 걸고 인사하던 여자가 있습니다16층에 혼자 살던 여자 끊임없이 나에게 건네던 인삿말잘 잤니?오늘은 몇 명이나 날게 해줬니이웃과 인사는 잘하니떨어질 때 의심은 없었니외롭지 않니... 농담처럼 받은 질문들을 그녀에게 그대로돌려주고 싶은데 오늘 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16층, 높이를 버렸다는 말을 불현듯 들었습니다 여자의 안녕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펼쳐보지 못한 책처럼나만 아는 여자의 모든 ..

소란 / 박소란

소란 - 박소란  우연히 만난 동명(同名),그는 자신을 여행자라 한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 나는 모르는 곳안개 자욱한 산맥을 오르고 인적 끊긴 해안가에 앉아 일몰을 보았다고 나는 모르는 소란 왠지 조금 쓸쓸하기도,그러나 곧 당도한 야간열차에선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 농담처럼 소란씨, 부르자얼굴이 붉어지고 전에 없던 기분에 사로잡혀 상상해본다 이대로 문을 박차고 달리는 나를지하 클럽에서 탱고를 추고 이름 모를 날들을 연주하는 나를결코 뒤돌아보지 않는  시 같은 건 쓰지도 읽지도 않는 소란먼 소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늦지 않게 목적지에 닿았나요? 그는 말한다언제나처럼 길을 잃었다고 세탁소에 가려고 나와서는 한참 동안 골목을 헤매요 밤에는 지진 때문에 잠을 설치고결국 잠들지 못하고커튼을 젖히면 난데없는 설원..

팽이의 방정식 / 남상진

팽이의 방정식 - 남상진  침묵으로 맹렬한 생이었다직립으로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종족 중심이 흩어질수록기립에 온전히 몰입하기는 힘든 법 살아가는 것은발끝으로 서서반듯하게 자신을 세우는 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묵언의 정진으로 깊어진다 무학요양원 백로실오래 돌던 팽이 하나가 요동친다 가쁜 숨을 삼키며 돌아가던 팽이가적막을 덮고 고요해진 저녁 이제그녀숨죽여돌지 않아도 되겠다  * 남상진 시집 ㅡ 시인수첩 시인선 089

재생 / 박소란

재생 -박소란  단추를 모으는 사람이 있다 헌 옷을 버리기 전단추를 하나하나 떼어 작은 상자에 넣어두는사람 자세히 보면 좀 징그럽잖아 꼭 누구누구 얼굴 같고, 눈만 댕그랗게 남아서겁이며 원망을 잔뜩 품고서나를 보고 있잖아 이상하게 집요하게 왜 이런 걸 모아요? 하면글쎄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하고 답할까 그러나 사실단추를 모으는 사람은 벌써 죽었다단추가 필요한 시간이란 영영 오지 않을 테니 단추는 살아 있다 아직도, 진짜 징그러운진짜란 이런 거겠지단추와 단추 사이미처 식지 못한 한가닥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일 한참을 들여다보는 일 여기 있었구나, 바로 여기 조그만 비닐에 싸서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속에 찬찬히 묻어둔다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또다시, 나는 징그러워지고 단추가 없는 옷 단추가 없는 ..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 금시아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 금시아  한여름이 탐욕스레 그림자를 잘라먹고 있었다그날처럼 장대비가 내렸다 기척을 통과한 사간들폐쇄된 나루에 주저앉아 있고물과 뭍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적막파닥파닥 격렬을 핥기 시작한다 한여름이 햇살을 변호하고그림자가 그림자의 풍문을 위로하면열 길 넘는 금기들장대비처럼 세상을 두들기며 깨어날까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왜 휘몰아치는 격렬마저 쓸쓸한 것일까 조용히 상을 물리면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가득해 서늘하거나 다정한 그리움 하나,소용돌이치며 자정을 돌아나간다 간혹, 이런 장대비의 시간은그림자 떠난 어떤 기척의 쓸쓸한 자서전이다   하루, 그리고 도꼬마리 씨  그대의 사주는 역마살입니까흩어지는 여행은 늘 성급합니다 멀리 갈 요량으로 ..

바게트 / 기원석

바게트 - 기원석  그의 시집은 바게트콘트라베이스만한 바게트시집에 패인 칼집 사이로블루베리매드크림치즈 같은달콤한 글자들이 배어 있다공원에서 제빵사가 외친다바게트 사세요바게트 사세요새벽부터 호숫가에 모인아이들이 물수제비를 띄우고가판대에 걸터앉은 제빵사가한마디 푸념을 한다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어프랑스인도 아니고독백에서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제바게트로 그의 독자를두들겨 팬다그는 눌러붙은 밥풀 같은몇 톨의 독자들을박박 긁어내고 부러진바게트를 행인들의 입에 쑤셔 넣는다.그의 시집은 바게트골프채보다 단단하고고드름보다 투명한 바게트콘트라베이스보다 거대한흉기를 공원에서 휘두르고바게트에 두들겨 맞은 독자들비명이 언덕을 넘어폭죽처럼 메아리치고제빵사는 수배되지도 않고사악한 위트를 곁들인 비유퍽퍽한 의식 덩어리로만든 이런 바..

좋은 아침 / 김동균

좋은 아침 - 김동균    아침이 필요하면 구두를 신는다. 구두를 신으면아침이 온다. 구두를 벗고 나면 일과가 끝난 줄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군요. 아침은 식상해.이 구두를 너무 많이 신은 거야. 구두를 바꾸자. 새구두를 신고 건물에 들어서면 "좋은 아침입니다"누가 인사를 한다. 이 구두가 가볍다는 말이 정말인가봐. 가방을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는다.의자를 바투 당기고 다들 즐거운 일에 몰두하고있군요. 구름이 걷히고 구두는 의자와 책상 형광등 그리고 천장 일부를 비춘다. 비로소 구두가 사라지나 봐. 그들처럼 나도 몰두하게 되나 봐.나직하게 말한 것 같은데 모조리 나를 쳐다보는아침. 이런 게 아침이라면 저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좋은 아침입니다."

무진정 / 주선화

무진정* - 주선화  별거 없다 했어요찬 기운만 돌아다녀요 이수정 연못황금 잉어가 살아요어두운 물속에서 나와유유히 따라다녀요비릿한 발자국 좋아하는 걸까요 잉어의 감정은 뭘까요연못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나신의 나무들연못에서 놀아요반영이 예쁘다고 사진 찍어요무진정은 없고 사진만 있어요그렇게 하나둘 사라지는 걸까요 무명옷 입고 춤추듯꽃불로 피어 낙화하듯재로 하염없이 흘러가듯 흔적을 찾아왔다면없다가 맞을 거예요나는 흔적이 없어요 아니, 온 적이 없으니까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ㅡ 주선화 시집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