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시 821

무진정 / 주선화

무진정* - 주선화  별거 없다 했어요찬 기운만 돌아다녀요 이수정 연못황금 잉어가 살아요어두운 물속에서 나와유유히 따라다녀요비릿한 발자국 좋아하는 걸까요 잉어의 감정은 뭘까요연못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나신의 나무들연못에서 놀아요반영이 예쁘다고 사진 찍어요무진정은 없고 사진만 있어요그렇게 하나둘 사라지는 걸까요 무명옷 입고 춤추듯꽃불로 피어 낙화하듯재로 하염없이 흘러가듯 흔적을 찾아왔다면없다가 맞을 거예요나는 흔적이 없어요 아니, 온 적이 없으니까요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ㅡ 주선화 시집 에서

작은 울림이 흐르는 / 주선화

작은 울림이 흐르는 - 주선화  장자제 대협곡조그만 사잇길 잔잔한 웃음소리가 먼 듯 가까운 듯 종소리처럼 들렸다 남자는 흐르는 물에 푸성귀를 흔들어 씻고여자는 아래쪽에서 빨래를 치대고아이는 물장구치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외갓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구름은 흐르고오솔길 푸른 바람이 물결처럼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미소진 민얼굴 여지없이 평화로워 보였다그냥 작은 울림이 날것 그대로 흐르고눈을 떼지 못한 풍경에 사로잡혀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뭔가 건네주고 싶었다가방을 뒤져 사탕 하나를 아이에게 건네고떨어지지 않는 걸음 재촉해 서둘러 내려왔다 이십여 년이 시나브로 흘러 색바랜 고궁을 걷는 듯입안에 쓴 물이 흐르는 힘든 순간에도 어둡지 않은 까닭은 그때 그 모습 어제인 양그 평온함이 그 아득함이 피어나 시..

다리가 긴 빗방울들 / 안주철

다리가 긴 빗방울들 - 안주철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또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요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 상자 모양의 선물이에요꺼내지 않아도 마음인지 알고요 다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다리가 긴 빗방울들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까요 혼자 또 웃고또 혼자 웃으면단란한 혼자가 되기도 합니다 창문 너머의 흐린 날씨를 방충망을 통해 보고 있어요흐린 날씨도 방충망으로 보면 촘촘하네요 내려오는 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같을 텐데한번 내린 비는 다른 계단으로 걷고 있는 듯해요아주 작은 소리까지 주워가면서 하루종일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제 스스로 절벽이 되는 듯해요 제가 쌓아올린 절벽에서 떨어져이 세상에서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세계를 엿볼 수 있을까요 오늘은 팔이 길어지지 않아서 밥을 차..

달팽이와 집 / 이설야

달팽이와 집 -이설야  자물쇠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집달팽이가 사네쓸쓸하게 부푼 말들을 담은 헐거워진 위장달팽이가 배를 밀며 수도관을 따라가네집의 헌 문들을 하나씩 열며눈들을 하나씩 닫으며 기어서 가네기어이 가네달팽이가 눈물을 흘리던 집 이 집에서 끝까지 가본 길은 아직 없다네서랍에서 덜컹덜컹 나사못이 빠지는오늘도 슬픔을 하나씩 발굴하며얼굴에서 구름이 다 뭉개질 때까지어둠을 배우지 같은 눈을 뜨듯 천천히칠이 벗겨진 대문 위를달팽이가 지나가네끈끈한 눈물로 안개를 섞어 칠하며 가네 칠이 끝난 달팽이햇빛에 등을 말리다가대문을 겨우 빠져나가네폐가들이 조금씩 주저앉는 골목길을천천히 가고 있네

불현듯 짐승이 / 최문자

불현듯 짐승이 - 최문자  사람들이 당신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했지만나는 당신이 자꾸 사람으로 보여 가끔당신한테서 툭툭 튀어나오는 짐승나는 사람만도 못한 그런 짐승이 좋아 그 짐승그 짐승을 찾으러당신의 뒤로 가서더 뒤로 가서당신을 바라보았어도대체 어떤 짐승이길래 불현듯 당신은 말했어사람으로 가는 구간 구간 그들이 서 있어짐승이 너무 많아짐승이 자욱해사람으로 하다가사람이 부족하면짐승으로 하다가짐승이 부족하면짐승만도 사람만도 못해졌어 어느 날당신은이미 눈물이 말라 있고흘러넘치는 사람의 전원까지 꺼버리고개처럼 뛰어다니는 당신을 보았어 긴 줄 끝에 텅 빈 자리사람의 폐를 숨기고 거기 서 있는 당신을 뭐라 부를지 몰라

행복한 눈물 / 조은솔

행복한 눈물* -조은솔  원망은 뼈대가 없어서밤늦게 찾아와요 들키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찾아와요 같이 배꼽 잡고 웃다가 뒤집어지면 들키는 건 매번 울음이에요 울다 보면 울음이 울음 깊이 빠져들어서놓치다가 가득 차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하는 울음은 없지만 가라앉기도 전에냉장고를 열게 하는 울음은 있어요 냉장고를 열다 보면 내일이 떠오르고 물컹한 토마토를 뭉텅뭉텅 자르고 있으면몸에 좋다는 건 다 생각나서믹서기에 죄다 넣고 갈아 마셔요 어제를 전부 취소하고 살아보고 싶어지거든요 다시는 살아 본 적 없어서 그래 본 적 없어서함부로 말하는 잔소리처럼 눈빛을 갖는 울음 앞에서 해도 해도 끝이 없는용서를 해요 얼렁뚱땅 견디기 쉬운 거짓말을 해요 *행복한 눈물 :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 장철문

호두나무 잎사귀가 있는 저녁 -장철문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막 생겨나는 달이 있었다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마음에막 생겨나는 사람이 있었다어스름 속에서 막 돋아난 달처럼막 피어난 호두나무 푸른 잎사귀 사이로, 돋아나는사람이 있다는 데 놀라고,그 사람이 지금곁에 없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데 또 놀랐다어스름 바람에 팔랑이는 호두나무 잎사귀 사이로, 그 사람도달을 보고내가, 그 사람에게 생겨나는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그 사람의 씽긋 웃는 웃음이호두나무 잎사귀 사이, 하늘에 떠 있었다어두워지는 호두나무 잎사귀 아래서그 사람을 보고, 다시보고호두나무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이 살을감고,달이 싱거워지고검은등뻐꾸기 소리와 호랑지빠귀 소리에 귀가 기울고,하늘에 떠 있는 그 사람이 싱거워지고검은등뻐꾸기 소리와 호..

양말 / 서진배

양말 -서진배  거 봐라 네가 가진 자루가 작더라도 왼쪽 오른쪽 나누어 담으면 너를 다 담을 수 있잖니, 너를 붙잡을 곳 마땅치 않아 들고 걸어가기 어려울 때는 너를 자루에 담아 들고 걸아가면 한결 편할 거야 방으로 드는 식당에서 너를 구멍 난 자루에 담아왔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너는 그 구멍으로 줄줄 새는 너를 들키고 싶지 않아 발을숨겨야 할 거야 자루를 아무리 당겨 올려도 자루는 내 무릎도 담지못할 뿐인데요 네 발만 담아도 너를 자루에 담는 거란다 황금색 계급장을 찬 어깨 앞에서 손을 바지 주머니에넣는 것만으로도 떨고 있는 너를 감출 수 있거든, 쓰레기봉투에 너를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발을 넣고밟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유리 거울처럼 깨진 너의 얼굴 조각들이 그 안에담겨 있는 줄도 모르고, ..

시대의 자화상 / 장진숙

시대의 자화상 -장진숙  인내심이라곤 씨알도 없지열일곱도 스물일곱도 아닌서른일곱씩이나 먹은 에미가 어떻게 그래지 남편 사고로 병실에 누웠다는데네 살배기 어린 것을 방안에 홀로 재워둔 채문 걸어 잠그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니엄마 찾은 아이 울음소리 귓가에 들리지 않았을까어떻게, 어떻게, 밥 먹고 잠도 자고 그리 지냈을까석 달이 지나도록 아기 혼자 그렇게 가둬두고한 번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을까가족이 가정이 모정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인두겹 쓴 버러진가 짐승인가 괴물인가내연의 사내랑 월세방에 잠들어 있다 붙들려왔다는고년, 참! 부끄럼도 모르는 것이 낯바닥 보일세라숨어서 저! 저! 말하는 본새 하고는누군가 찾아와 지 새끼 데려갈 줄 알았다니!죄책감 책임감이라곤 씨알도 없는 여자개념도 양심도 헐값에 넘긴..

벌 / 최석균

벌 - 최석균  벌을 만났다 길바닥파닥파닥 날아오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꽃밭을 경작하고 있어야 할 입과 다리가봅맞이 길목에서습격을 당한 듯 뒤집히고 있다 동반 추락의 환영에 붙들려 정신 줄을 놓고 서 있으니환청이 날아든다 잉잉 벌집을 쑤시듯 하늘과 땅을 들쑤시는 말이 난무하고식량난을 예견하는 입이 분분하다 떨어진 운석보다 충격적일 수 있다는뜨거운 말 한 개를 주워 안주머니에 넣었지만얼어붙은 발바닥은 떨어지지 않고 못 살겠다 봉기하면서따끔하게 한번 쏘아붙여 볼 일이지괜한 핑곗거리를 띄우며 두 손 모으지만돌아갈 길이 안 보인다 벌 서는 몸으로 서서난데없는 추락에 방향을 잃고파닥대는 길바닥